brunch

할머니는 왜 죽지도 않고 백 년 동안 살아있어요?

by 산들바람

딸아이가 만 4세, 6살 되던 해 어느 날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반응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왜 죽지도 않고 백 년 동안 살아있어요?"


올해 4월 돌아가신 친정 엄마는 1936년에 태어났으니 일본인을 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말 탄 헌병이 옆을 지나고, 칼 찬 순사를 수시로 보았으며 학교에서는 일본인 담임 선생님을 통해 일본 교육을 받았고, 심지어 본인과 동네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하여 일본 이름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마치 일본과 조선은 양반과 천민의 계급구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친정 엄마가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이른 나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남매를 키우던 외할머니는 세 살 터울인 외삼촌과 엄마를 함께 옷장 뒤로 데리고 가시더란다.

여태 나고 자랐어도 방 안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옷장을 벽에 바짝 붙이지 않고, 어린 남매와 어른 하나 꽉 끼어 앉을 만큼의 틈을 내놓은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남매를 불러 앉힌 외할머니는 불씨를 댕겨 호롱불을 켠 뒤 치마 폭에 숨겨온 무언가를 꺼내어 크게 펼쳐 보인다.


"어머니! 이기 뭡니꺼?"


"이 국기가 진짜 우리나라 국기다!!!"


"예? 우리나라 국기는 학교에 있는 일장기 아이라예?"


낮게 흔들리는 호롱불빛 아래서도 할머니의 눈동자는 더욱 또렷했고, 낮은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지만 더욱 단호했다. 좁은 벽엔 세 사람의 그림자가 이들을 더욱 크게 감싼다.


"홍아, 숙아!!.... 우리나라는 일본이 아이고, 우리 글은 히라가나가 아이다"


"그기 무슨 소립니꺼?"


엄마가 아는 국기는 하얀 바탕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전부인 단조로운 것이었는데 오늘 처음 본 이 국기의 네 귀퉁이는 마치 암호와도 같은 각기 다른 단선과 빨강과 파랑이 물결치듯 어우러진 화려한 자태에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다.

그날부터 외할머니는 어두움이 깊어질 때면 어린 남매를 틈틈이 옷장 뒤에 불러 앉혀 조선말기에서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구한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단다.

그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올드랭 사인의 곡조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는 아녀자의 가느다란 목소리엔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이 그대로 묻어있었다.

그전엔 밤이 되면 어머니가 어디로 가는지 늘 궁금했는데 이제 어린 남매에게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낸다.


"우리 조국이 독립 할 수 있는 길은 배움밖에 없다...!!!"


낮에는 일본인과도 스스럼없이 웃고 지내던 외할머니는 밤이 되면 몸빼를 벗어던지고 일본인의 눈을 피해 동네 부녀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야학을 열어 그들에게 언문을 가르치고, 역사를 가르치며 계몽운동을 하고 계셨다.


마당 한편엔 흡사 작은 남새밭으로 보이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장된 출입구를 통해 나무 사다리를 밟고 내려가면 흙벽에 거적을 깔아 둔 방공호를 파 둔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엔 공습 훈련이 더욱 잦아졌다.

무시로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미숫가루 등의 비상식량을 챙겨 남새밭으로 위장한 마당의 방공호 속으로 몸을 피한다.

그 작은 공간에 외삼촌은 나무 궤짝에 보자기를 씌워 그 위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었단다.


어느 날 학교에서는 전장에 나가 있는 일본군을 독려하기 위해 학생들이 직접 만든 비행기를 날리는 대회가 열렸다.

다재다능한 외삼촌은 그림과 조각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결국 외삼촌과 일본인 학생이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이 있기 전날밤 어린 외삼촌은 호롱불 아래 앉아 나무를 얇게 깎아 비행기를 만드는데 열중한다. 그런 어린 아들을 위해 외할머니 또한 함께 앉아 밤늦도록 바느질을 하며 아들을 응원했다.

드디어 다음날 학교 운동장에는 일본인 교장 선생을 비롯한 전교생이 운동장 가득 모여 섰다.

나의 친정 엄마도 오빠를 응원하며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본다.

조선 학생들은 결코 속을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외삼촌이 일본인을 이겨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운동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시작을 알리는 일본 선생의 신호에 맞추어 둘은 동시에 비행기를 날렸다.

두 학생의 비행기는 가볍게 이륙하여 운동장 위를 빙글빙글 날아간다. 그러나 일본 학생의 비행기는 곧 학교 운동장에 고꾸라진다. 아직도 잠자리마냥 가볍게 날아가는 외삼촌의 비행기를 보는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른다.


"와~~~ 와~~~!!!!!!"


하지만 너무나 잘 만들어진 외삼촌의 비행기는 결국 학교 운동장을 벗어나 동네를 향해 날아가고 만다.

결국, 시상식에서는 교내 운동장에 떨어진 비행기를 만든 일본 학생이 1등을, 장외로 날아가 멀리서 찾아와야 했던 비행기를 만든 조센징 외삼촌은 2등을 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엔 고사리손을 한 학생들에게도 일을 많이 시켰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모를 모래를 양동이에 가득 퍼 담아 한편에 켜켜이 쌓아 올릴 때마다 일본선생은 학생들의 여린 팔목에 도장을 한 개씩 찍어준다.

다섯 개의 도장을 받아야 교실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럴 때면 세 살 많은 외삼촌이 자신이 채운 양동이를 여동생인 엄마에게 몰래 들려주곤 했다.

일본순사들은 위안부에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는 노래를 동네 아이들 사이에 퍼뜨렸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던 아이들은 길을 걸으면서도 고무줄을 하면서도 무시로 흥얼거린다.


친정엄마가 소학교 3학년이 되던 어느 여름, 여느 때처럼 학교 갈 채비를 할 때였다.


"숙아, 오늘은 우리가 나라를 되찾은 날이다!!"


외할머니는 격양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의 손을 잡고 밖을 나섰다.

옷장 뒤에서나 보았던 화려한 국기가 다 어디서 났는지 거리마다 크게 나부끼고 사람들은 두 손을 올려 연신 "만세! 만세! 대한제국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해도 아무도 잡아가는 이가 없다. 또한 그 많은 그릇, 신발들은 다 어디에 있던 것들인지 곳곳마다 장이 서고 그야말로 온 세상에 잔치가 벌어진 듯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얼이 빠져 한참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그때, 저 멀리 기모노 차림의 담임선생이 보따리를 들고 게다를 신은채 총총총 재빠르게 걷고 있다.

길에서 만난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막 숙이려는데 외할머니는 팔을 들어 올려 엄마를 막아선다.


"오늘은 인사 안 해도 된다!!"


그래도 담임 선생님은 좋은 일본인이었다. 항상 엄마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선에도 이렇게 똑똑한 아이가 있느냐'던 사람이었다.

거리에는 담임 선생님 말고도 쫓기듯 어디론가 떠나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또다시 사상의 기로에 내몰려야 했던 민초들....

당시 국민의 76프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원했고, 더욱이 모두가 평등하게 가진 것을 나눈다는 사회주의 사상은 지식층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세상을 바꾸는데 함께 동참하자며 한동안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한창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두 모자는 첩보를 입수하고 몸을 피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엄마는 대문 앞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놀다가도 저 멀리 형사가 나타났다 싶으면 얼른 집으로 달려가 알려주기도 했단다.

어느 날은 엄마와 친할머니(나에겐 증조할머니)가 함께 잠든 늦은 밤, 마당에서 분주한 남자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잠시후, 구둣발로 툇마루를 훌쩍 뛰어올라 세차게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플래시로 샅샅이 방 안을 살펴본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저들에게 들릴까 싶지만 엄마는 깊은 잠에 빠진냥 그대로 눈을 감고 있다. 다행히도 그들은 재빨리 문을 닫고 어디론가 바삐 움직였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이미 첩보를 입수하고 몸을 숨긴 뒤였다...

그러나 몇 달이 채 안되어 어떤 이유에선지 외삼촌과 외할머니는 사회주의에 회의감을 느끼고 등을 돌려 단체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북한군이 기습적인 공격을 해 오며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초반 전세가 약했던 남한은 북한군이 낙동강 이남까지 점령해 오자 남쪽 사람들은 더 아래로, 아래로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민과 짐을 실은 배 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어떤 이는 솜이불과 쌀뒤주 따위를 배에 실어 정작 사람은 배에 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친정 엄마가 먼저 배에 오르고 외할머니가 막 발을 내디딜 참이었다. 폭격이 쏟아질세라 마음 급한 피난 배는 사람을 기다려볼 생각도 없이 야속하게 떠나고 모녀는 원치 않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한이네!!!! 우리 숙이 좀 잘 부탁한데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을끼다!!!!"


한이네는 저와 제 식구들 살기도 버거운 피난길에 이웃자식까지 떠맡겨진 신세가 된 것이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한가운데서 피난민을 실은 배는 종이배처럼 휘청대고 그 와중에 꺽꺽거리며 뱃멀미를 하는 사람, 울부짖는 아이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다. 사람들은 급기야 쌀뒤주며 옷보따리며 모두 다 바다에 내던져버렸다.

외할머니는 수완 좋은 아들에게 동생이 혼자 배를 타고 거제로 향한다는 말을 전했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외삼촌은 어찌 손을 쓴 것인지 배에서 내리려는 엄마를 미군들이 데려다 보호하고 있던 중 외삼촌이 데리러 왔다고 했다.

한편, 전쟁이 한창이던 때 친가 친척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한 이력이 밝혀지며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 당시 보기 드물게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을 나온 인텔리들이었지만 부모를 비롯해 아들자식과 며느리들, 딸과 사위까지 수십여 명이 포승줄에 묶여 배에 태워져 한날한시에 모두 바다에 수장되었다.

우리 일가의 아픈 기억이기도, 또 아픈 우리 역사의 한편이기도 하다.


지루하고 몸서리쳐지는 전쟁이 끝났어도 곳곳에는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았다.

친정 엄마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만 교실은 이미 상이군인들의 병실이 되었고,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대여섯 명이 앉을 만한 긴 나무 의자를 놓고 수업을 받았다. 그나마도 한 의자에 앉은 사춘기 소녀들이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의자를 바짝 당겨 앉고 싶어도, 떨어져 앉고 싶어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괜한 눈치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었단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여학생들은 군인들의 피범벅이 된 군복을 양동이에 담아 개울가에서 빨래를 해야 했다.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과제도 빠지지 않았다. 그림에 소질이 없던 엄마는 외삼촌에게 떼를 써서 포스터를 그려달라 했고, 외삼촌이 그려준 그림을 제 것인양 내놓은 것이 일등을 하게 되어 너무도 부끄러워 시상식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숨어다닌 적도 있다고 했다.

휴전이 되었어도 체제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외가의 이러한 이야기를 오랜 시간 듣던 어린 손녀는 그렇게나 수없는 우여곡절의 사건을 겪고도 홀로 남아있는 할머니가 백 년 세월만큼이나 긴 세월을 어찌 무사히 살아냈을까 싶었는지 '그런데 왜 할머니는 백 년 동안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 있어요?'라고 물었던 것 같다.

영특했던 딸아이는 나름의 분석을 해 본다.


"난, 사회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고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뱀에게 꾐을 당해서 선악과를 따 먹고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됐잖아요. 그러니까 죄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데 어떻게 인간이 만든 법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만들 수 있겠어요. 이미 죄가 세상을 지배하는데 어떻게 평등하게 나누고 살 수가 있겠어요. 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하나님의 법으로 통치해야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되지 않겠어요?..."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과 견주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상에 대한 제 나름의 의견을 내어 놓는다.


이 이야기는 어쭙잖은 정치나 역사에 대해 논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날이기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꺼내본 것이다.

질곡 많은 역사 속, 어느 한 가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또한 우리 가계에 있었던 희, 비극의 역사는 동시대를 살아간 여느 인간에게도 운명처럼 강요된 그 시대의 역사였다.

원하든 원치않든 혹독한 풍파에 내몰려 지독한 운명을 살고 죽어야 했던 지워지지 않는 우리 모두의 과거였다.

다만 남아있는 후손인 나는 또 다른 역사의 오늘을 살게 되었고, 새로운 가계의 이야기가 내 후손들에게 전해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역사 속 인물로 남게 될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