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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랑 Oct 18. 2023

전공의 선생님 없는 한 주 보내기

좌충우돌 정신과 입원기(8)

입원 22일차, 폐쇄 5일차

월요일. 어김없이 다섯 시 반 채혈. 다시 잠이 안 온다. 앞에 계신 분은 채혈 안 한다고 난리 치다가 노련한 간호사 쌤 설득에 넘어갔다. 간호사 쌤한테는 미안하지만 약간 보는 재미가 있다.

대회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항상 모르겠다. 그래서 잘 지냈다, 모르겠다로만 대답해 버렸다. 지난주에도 그런 거 같은데 나… 대회진 싫다. 괜히 긴장됨.


전공의 선생님이 내가 내 마음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거 같다 그러셨는데 정말 제대로 짚어 내셨다. 자퇴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라서 그만큼 버틴 거란 이야길 또 들었다. 나를 울려야겠다고 그러셨는데 난 정말 환영이다. 울 수 있었다면 내가 폐쇄 넘어오는 일도 없었을 거다.

교수님께 엄마와 면담한 내용을 여쭤봤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나눠서 말해 주셨는데 나쁜 소식은 엄마가 내가 말씀드렸던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거. 즉 숨기고 싶어 했다는 말. 좋은 소식은 엄마가 내가 힘들만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는 거. 교수님이 엄마에게 바라는 점이 있냐 물어보셔서 나는 적어도 엄마가 내가 자해를 했을 때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고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고 하셨다.

면담 끝나고 나오는데 주변에서 무슨 면담을 이렇게 오래 했냐고 난리였다. 오래 한 줄도 몰랐는데. 다들 내가 면담실에 들어가고 나오는데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부루펜 먹어도 머리 아프고 자나팜 먹어도 불안하다. 이런 밀가루 약들.


입원 23일차, 폐쇄 6일차

전공의 선생님 내일이면 휴가 가신다. 10일 동안 다른 전공의 선생님과 면담을 하게 되는데, 쉽지 않을 거 같다.

왜 면담록이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입원 24일차, 폐쇄 7일차

드디어! 내일이면 개방에 넘어간다.

내 기분이 어떤지 모르겠다. 일단 확실한 건 계속 놀자고 하는 다른 방 동생이 상당히 귀찮다는 거. 그리고 글 쓰기도 귀찮아 죽겠다는 거. 아 그래. 난 무기력한 거다. 난 무기력이 정말 싫어. 무기력은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상기시킨다. 난 안된다는 거. 이 우울의 끝은 없다는 거.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펑펑 울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한다. 그냥 짜증 나게 한 두 방울 떨어질 뿐. 아무리 울려고 한들 잔뜩 고여 내 시야를 흐리게 만들 뿐이다.

멍한 게 심해진 것 같다. 또 괜찮은 척해야 할 거 같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고 있고. 내 감정, 내 기분을 들여다보기보단 주변 상황에 맞춰 기분을 바꿔나가고 있다. 이 기분, 정말 싫다.

이상하게 폐쇄 있으면서 엄마를 보고 싶다고는 생각을 안 한 거 같다. 음… 왤까. 오히려 신경 안 쓰여서 좋았던 거 같다. 나 진짜 나쁘네.


입원 25일차

휴가 가시기 전, 전공의 쌤이 그러셨다. 탁구를 칠 때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치는 게 가능하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슬슬 치자고. 미스도 많이 내면서. 그 말이 이제 생각났다. 개방 가면 열심히 말고 대충대충 쳐야겠다. 적당히 무시도 하면서. 근데, 그래서 나 언제 옮기는데?


교수님 면담에서 무기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무기력은 열심히 해도 안될 때 나타날 수 있다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말 작은 목표 세우고 그거 이뤄보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전공의 B선생님과 면담. 공부와 무기력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급할수록 돌아가기. 내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고 거기에 맞게 계획 세우기. 조금씩 차근차근할 때가 나중에 더 빠르게 갈 수도 있다는 거. 여기서는 놓은 공부를 다시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할 거 다 한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약속해달라고 하셨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기, 괜찮은 척하지 않기, 혼자 감내하지 않기. 어려운 약속이다.


작은 목표에 뭐가 있을까. 강의 하나 듣기. 3일에 하나? 아니면 하루 한 장 책 읽기. 둘 다 좀 어려운데. 모르겠다. 교수님이랑 같이 정해봐야지. 아 매일 일기 쓰기. 이건 할 수 있어.


생각보다 막 귀찮게 하지 않는다. 정말 다행이지. 역시 개방에 오길 잘했다. 다만 충동은 좀 든다. 죽고 싶다는 마음. 근데 익숙하다. 친구처럼.


울고 싶다. 근데 괜찮은 척해야 할 거 같다. 괜찮은 척 안 하는 게 약속이었는데 벌써 이러다니.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차마 표현을 못 하겠다. 누구한테 말해야 해?


입원 26일차

교수님 면담. 초반에 이야기하셨던 거 같은데 5분 투자 이야기가 나왔다. 고통감내하기 같은 기술을 5분 정도 투자해서 연습하는 거. 말 나온 당일에만 조금 해봤지 꾸준하게는 못 했다. 거의 유일하게 말 안 들은 거. 작은 목표로는 운동하기, 공부 계획 세우기, 11시 공부 모임 하기 등등.

생각에 몰두하곤 한다. 울지도 흐느끼지도 못 하지만 눈물 한 두 방울 억지로 쥐어 짜내며 우는 시늉이라도 해본다. 하지만 막상 눈물이 흘러내리면 닦아내기 바쁘다. 언제쯤이면 마음껏 울기라도 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마음껏, 웃을 수 있을까.

뒤엉켜 덩어리가 된다. 무슨 단어고 무슨 문장인지 인식하기 힘들다. 이젠 내가 쓴 글도 의미를 알기 힘들다.


입원 27일차

이렇게 일기를 안 쓰기도 드문데. 보여줄 사람이 없으니 더 그럴지도. 휴가 가신 전공의 선생님이 8월 말까지만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쌤 가시기 전에 그냥 퇴원해야겠다.

모든 게 꿈속의 일인마냥 자꾸자꾸 잊혀진다. 나는 그게 너무나 싫어 발버둥을 치지만 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자꾸자꾸 기록한다. 잊는 게 싫어서.

또 머리가 아프다.


입원 28일차

하루종일 자기만 했다. 글을 쓰고 싶지만 쓰지 못한다. 내 상태가 어떤지 나도 잘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이 불편하다. 예쁜 가면을 쓰고 웃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불편하다. 나 혼자 있고 싶어.

남겨질 이들을 생각해 본다. 얼마나 상처가 될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지만 끝까지 이기적인 나는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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