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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랑 Oct 25. 2023

시끄러운 병동

좌충우돌 정신과 입원기(9)

입원 29일차

대회진이란 폭풍이 지나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싫기도 하고. 주말이 참 길었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때 내 일부였기 때문이며, 나는 한때 그 사람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한때 소중했던 것들> 중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어떤 형태의 이별이던 상처가 되는 이유는 서로에게 영향을 줬기 때문이라는 거. 소중했기에 아픈 거지.


입원 30일차

그 어느 때보다도 내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진료 일지도 쓰지 않았고 일기도 글도 쓰지 않았다. 사실 뭔가 쓰려고 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못 썼다는 게 더 맞는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면담하는 것도 힘들었다.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데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내가 자꾸 애매하게 뭉뚱그려서 답을 했더니 교수님은 꼬리 질문을 던지셨다. 그리곤 감정이라는 덩어리를 작게 쪼개서 들여다보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진 거라고 설명해 주셨다. 감정을 덩어리로 취급한다는 게 신박했다. 그리고 치료 과정에서 목적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지금 같다고 하셨다. 나한테 목적을 물어보셨는데 난 모르겠다고 답했다. 남들처럼 ‘나아지고 싶다’ 이런 거랑은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이 주는 병동에 많은 일이 있었다. 주로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일이었는데, 다 지나고 지금 생각해 봤을 때 각자의 미성숙함과 결핍, 연민, 욕구 뭐 그런 것들이 뒤엉켜 만들어낸 불협화음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상황 안에 있을 때 느낀 무거운 감정들에 비해 큰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갈 사람들이었고, 지나갈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개방병동이라도 폐쇄되어있는 정신과 특성상 사람들끼리 마찰은 더 크게 다가오는 건 맞는 거 같다. 어쨌든 당시 나는 좀 크게 동요를 느꼈고 두 페이지 빼곡하게 상황과 감정을 정리했었다. 그리고 내가 화나면 무섭다는 소리를 들었지. 그래도 몇 번 내 말하고 안 먹힌다 싶어서 자리를 피했는데 그건 정말 잘 한 선택이라고 느껴진다.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때 말을 내뱉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입원 31일차

어찌저찌 상황이 정리되었다.


나는 어떻게든 글을 써보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계속 만들어낸 문장 같은 것들만 나오고 있다.

이제 이곳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면서 최근 만난 사람들로 인한 스트레스만 제외하면 나름 괜찮은 생활을 보내고 있는 거 같다. 그게 꼭 내가 뭔갈 하거나 기분이 좋다거나 그런 말들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내가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뭘까. 그냥… 부모님과 떨어져 있단 사실 만으로도 안정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아니면 여기가 안전하다는 생각 때문에.

다음 주면 다들 퇴원한다고 한다. 나와 친한 사람도, 친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심심할 거 같기도 하고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지금은 힘든 줄도 모르겠다. 다들 힘드니까 나 하나 힘든 건 힘든 축에도 안 속하는 것 같다. 내 압축 프레서는 오늘도 잘 작동하는 중이다.

교수님은 어제 있었던 일을 들으시더니 각자의 목표에 집중하고 개인의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해 주셨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는 시도가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들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거리를 두라고 하셨다.


입원 32일차

오늘의 숙제

샤워하기, 퍼즐 30분 맞추기​

오늘에 집중하는 게 과제다. 아까는 면담실 들어가서 공부하고 나왔다. 강의 하나 다 들었는데 나름 만족.


입원 33일차

놀랍게도 입원 이후 처음으로 어제 일기장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날짜도. 위에 쓴 건 블로그에서 가져온 기록이다. 어쨌든 뭔가 단단히 잘못된 하루였음이 분명하다. 그치만 오늘도 딱히 다른 거 같지는 않다.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뭘 써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다. 놀라운 점은 오늘이 벌써 금요일이라는 것. 그 말인즉슨 월요일이면 전공의 선생님이 돌아오신다는 거다!!! 시간 빠르네…


내가 하는 거라곤 그저 자거나 휴대폰으로 해리포터를 다시 읽는 것. 이젠 그마저도 질릴 만큼 했다.


우울증은 삶을 꾸려가는 방법을 잊게 만든다. 하루하루가 버텨야 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일기도 안 써서 전공의 선생님 돌아오시면 보여드릴 것도 별로 없고 요즘 면담에서 하는 말이라곤 “모르겠어요” 밖에 없으니 나도 내가 답답한 상황이다. 내가 내 마음을 숨기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너무 멍하고 무기력한 탓인 거 같다.


무슨 이유에선지 면담을 하기가 싫었고 교수님이 그걸 알아채셨다. 그래서 교수님이 탁구나 칠래? 그러셨고 난 좋다고 했다. 10번 랠리 하기를 목표 삼아서 쳤고 마지막엔 거의 20번 가까이 랠리를 했다. 교수님 탁구 잘 치셔…


입원 34일차

오전 내내 잠만 잤다. 진짜로. 그리고 아직도 졸리다. 여전히 무슨 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폐쇄 병동에 갔다가, 친구는 퇴원하고, 전공의 선생님도 휴가 가시면서 내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느끼게 된 것 같다.

서러웠고 외로웠으며 지독했고 악착같았다. 내 삶을 설명해 주는 단어들 인 것 같다. 울지 못해 서러웠고 곁에 있지 못해 외로웠으며 반복되는 시간은 참으로 지독했고 그걸 끊어내지 못 해 악착같이 살았다. 그 속에서 느낀 건 상처받지 않으려면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내 안에 단어와 문장들이 사라져 가는 걸 느끼는 일은 꽤나 버거운 일이다. 다른 이들의 문장을 읽으며 어떻게든 빈자리를 채워보려 하지만 그래봤자 남의 문장을 훔치는 일만 될 뿐이다.


이제는 익숙해지지 않았나. 사람들의 싸늘한 눈빛,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 나는 홀로일 수밖에 없단 것까지. 이런 말들에 익숙해진 나도 그냥 착잡해질 뿐이다. 어쩌면 알아봐 주길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한 자락 관심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끝내 연락이 오지 않더라. 나는 너의 프로필 사진과 메시지를 보며 너의 일상을 추측할 뿐이고. 왜 너는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궁금해하면서.


입원 35일차

꿈을 꿨고 꿈에서 펑펑 울었다. 숨이 막히도록. 꿈속의 내가 부럽다. 스스로 생체기를 내는 일도 이젠 버겁다 못해 지겹다. 더는 누구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되고 싶지 않은데 내가 죽고 싶다고 죽어버리면 나를 위해 슬퍼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죄책감에 죽지도 못하게 만든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준다던데 삶은 왜 내게만 아름답지 않은 건지 대답해 줄 신이 있다면 묻고 싶다. 그냥 어느 날 내가 콱 죽어버려도 아무도 슬프지 않으면 좋겠다.

큐브를 맞추면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다. 그게 참 좋은 거 같다. 드디어 내일이면 전공의 선생님이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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