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양육의 결과 #08
완벽주의적 성향의 나약함
마사 누스바움, 강박적 엄격한 육아로 완벽주의적 육아
_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라
마사 누스바움,「감정의 격동 1 인정과 욕망」, 유아기의 초기감정들이라는 장에서
아기는 주양육자의 보호와 돌봄을 받으면서 확장된 변형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즉 자기의 육체를 사용하지 않고도 필요를 충당할 수 있는 변형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기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하면서 자란다. 유아는 초기에 욕구와 요구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데, 즉 배고음이라는 신체적 욕구, 불안이라는 정서적 필요의 요구(need, 바람)를 말한다. 아이는 계속하여 자기가 의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분노를 경험하는 '애증변존성'의 복합적인 감정을 겪는다. 그러면서도 일관성있는 주양육자와의 관계에서 그들이 서서히 모든 것을 돌봐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는 느껴가면서 조화로운 상호존중에 대한 관계성도 함께 습득해 간다. 이러한 안정적인 과정에서 유아기의 모든 것이 해결됐던 전지전능함의 단계에서 독립된 존재로의 상호존중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정서적인 힘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뢰와 독립이다. 꾸준함과 연속성이라는 요소가 이후의 성장에 소중한 자원이 되어준다.
아마도 나르는 그 반대의 경우에 놓여 있지 않았을까. 남편은 엄마의 죽음을 군대 생활 중 스물다섯에 들었다고 했다. 어머님은 쉰둘의 나이에 신장병, 그리고 형님의 말을 통해 들은 우울증의 침체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친할머니는 구십이 세까지 사셨다고 했다. 남편의 아버지는 38년생으로 여덟 살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신다. 그렇다면 남편의 친할머니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겪으신 분이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지금으로 초등 6학년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4년 후 고등학교 때 지금으로 사이비 종교에 가입하였다고 했다. 남편은 내가 대학원 학기 중에 부인과 수술을 하게 된 때 우연히 "아 우리 엄마가 할머니와 아부지 때문에 스트레스받으셔서 돌아가셨나?"라고 혼자 독백하는 것을 보았다. 남편의 언어에는 강한 시어머니 빙의체가 남아있다. 내가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퇴원할 때 산후조리실은 5층이었다.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그는 굳이 내가 빨리 회복해야 한다면서 병원의 낯선 아주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를 추궁하면서 아이를 덥썹 뺏더니 짐은 네가 들으라며 5층에서 걸어가야 빨리 회복되지라며 나를 두고, 비상계단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 순간 내 아이를 뺏길 것 같은 불안함의 엄습, 그리고 아이를 맡길 수 없다는 초조함으로 또 남편과 같이 있고 싶은 간절함으로 본능적으로 계단을 따라갔다. "아이고 여기 엘리베이터 타고 가지 그래~."라는 낯선 아주머니의 감사의 위로와 걱정을 뒤로하고 아직 아픈 몸으로 5층을 내려갔다. 그때부터 나의 불안도 크게 증폭되었다.
잔인함을 감춘 훈육이란
남편을 그렇게 성장시킨 배경은 무엇일까? 그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흘린 언어와 저명한 학자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시아버지는 남편을 체벌할 때 허리띠를 사용했다고 했다. 긴 채는 짐승에게 쓰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체벌은 흑인 노예들의 비극적인 삶을 볼 때, 그리고 야만시대의 신분사회에서 사람을 짐승 취급할 때나 영화같은 것을 상영하는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보았다. 그것은 권력을 남용하는자들이나 감시자들이 썼던 도구 아닌가? 남편의 언어ㆍ행동ㆍ 마음자리는 그들의 그늘이 분명하다. 첫 아이를 낳아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할 때 남편이 내게 삼일째부터 계속 집에 갈 때까지 한 말이 있다. "옛날 같으면 애 낳고 바로 밭일하는데 빨리 일어나 일해. 이제 그만 쉬고."라고 재촉였다. 그때 남편의 나이 35살, 그 안에 80대 노인이 드러선것 같았다. 그래서 난 더욱 신혼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무서웠다.
마사 누스바움의 저서에 나온 유아 초기, 안아주기 돌봄을 실패한 사례를 살펴보자. 그녀는 대상관계학파인 소아과의사 위니콧(1986)의 연구를 소개한다.
젊은 남성 의학도인 환자 B사례
그는 자연스럽게 처신하거나 개인적 생각을 하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정하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비치게 되었다. 그것은 언어와 생각에 대한 부단한 감시를 통해 자신의 내적 세계에 대한 전지전능한 통제를 유지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_356p.
아이를 낳은 후 시아버지가 우리 결혼 4개월째부터 벨을 안 누르고 무단으로 매주 오신 이후 지점부터 남편은 경제적인 불만을 많이 토로하면서 내게 이런저런 지적질을 해댔다. 그는 주로 빨래해라, 돈 더 벌어라, 다른 사람은 사짠(돈 잘 버는 전문직,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데 잘못 결혼했다는 등의 독백형을 겉으로 내두르면서 동시에 내게 폭력적인 언어를 쏟아 부었다. "여자와 아이는 때려야 말을 듣는다."라는 그에게 이미 깊이 내면화된 듯한 언어들이었다. 주말이면 시아버지댁 시골에 함께 배웅해드리면서 남편이 차 안에서 어린아이를 보내, "칭얼대니 때릴 때도 없고."라고 궁시렁거리자, 시아버지는 "아이고, 때릴 때가 어딨냐~ 오줌 냄새도 고소한디." 라는 대칭도 안 되는 이상한 말들을 해댔다. 그들은 왜이리 꿍짝이 잘 맞는가? 예상되는 대화구조가 아닌 바람에 시간이 지날수록 구역질이 나고 분노가 이글거리고 혐오스러웠다. 또 다른 저런 인간들이 이 세상에 숨어있겠지. 그들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법륜스님의 채널을 자주 보면서 마음의 정화를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내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인간말종들을 힐난하게 비판하는 니체의 언어만이 나를 지지해 주는 것 같았다.
다시 위니콧의 환자 B를 진단해 보자. 나는 진단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도 환경의 영향으로 질병을 가질 수 있다. 병이라고 하면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정신병이라고 하면 새로운 정신을 받아들이면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마음이 강하다. 그런데 큰 충격으로 세포의 변형이 생겼다면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의지에 의해서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강하다. 이 마음이 그와 맞선 이틀째부터 자신의 정황을 설명했음에도 나는 괜찮았나 보다. 위니콧의 논문의 부록에 첨부되어 있다는 환자의 정황은 이렇다. 환자 B는 엄마에 의해 9살에 분석을 하게 되었고 그 후 8년 후 엄마에게서 병리적 태도를 들었으며, 그 이후 심신쇠약으로 인턴 의사가 된 젊은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환자 B를 6달간 분석 후 다시 14년 후까지의 기록된 보고서이다. 환자 B의 엄마는 완벽함에 대한 엄격한 요구, 아이의 별개의 삶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태도가 일종의 아이의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묘사되고 있다고 전한다. 주석 51.52.(356p.)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은 시아버지, 자신의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다. 자신은 아버지가 했던 말, "우리는 우월인자제, 네 할머니가 머리가 엄청 똑똑하셨어."를 달고 사셨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않아도 되는 때에도 나는 남편의 육성을 들어야 했다. 스스로 세뇌하려고 그리도 독백을 해대는지.
나는 유아기의 트라우마가 있고, 아빠에게 1미터가량 되는 대나무채로 맞았기 때문에 울면서 억울하여 '이건 부당해, 난 그냥 울었을 뿐이야.' 를 되뇌며 옳지 않으니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닮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남편은 나와 반대였다. 그 독단적이고 스스로는 완벽하지 않으면서 자녀에게는 완벽하라고 재촉인 부모밑에서 자라며 우리에게 형성된 깊은 감정은 다음과 같다.
강박적 양육 결과ㅡ완벽주의적 성향이 준 감정들
나의 경우
두려움. 수치. 공포.
싫어증
히스테리
구토
불신ㆍ분노
고집ㆍ집착
고정관념
ㅡ자기부정ㆍ자기 불확실ㆍ주저함ㆍ행동지연
남편의 경우
분노. 혐오
구토 비슷 한 숨 쉬듯 주기적인 큰 소리의 트림
거식증
강박증
자기 과신
불안ㆍ 두려움ㆍ수치
타인불신ㆍ회피
신경증
왜곡
굴곡
전도ㆍ반대
과한 자존감
우월과 열등사이
-과한 자기 과신ㆍ타인 혐오ㆍ무책임ㆍ비도덕성
재가 그를 처음 만났는데 분별하기 매우 어려웠던
자존감과 도덕성차이는 무엇일까? 이 글은 다음을 기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