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詩] 화요일 아침에 보내드리는 나태주님과 이근대님의 시, 두 편
시가 있는 시월의 둘째 주 화요일입니다.
지독히도 덥고 습했던 여름이 어느새 감기 조심하라는 안부를 주고받는 쌀쌀한 계절로 바뀌었는데요. 오늘은 절기 가운데 열일곱 번째로 찾아오는 한로입니다.
한로가 지나면 찬 공기를 만난 이슬이 비로소 서리가 되어 내리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의 누군가처럼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을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맬”수도 있을 텐데요.
가을이 깊어갈수록 따뜻함이 더욱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세상 가장 소중한 나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줄 정다운 시 두 편을 보내드립니다.
먼저 ≪너의 초록으로, 다시≫(더블북, 2022)에 수록된 서정시인 나태주님의 시 <아끼지 마세요>입니다.
아끼지 마세요.
나태주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결혼식장 간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 옷 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스런 마음 그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좋은 옷 있으면 생각날 때 입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은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은 때 들으세요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도 그대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너의 초록으로, 다시≫는 나태주 시인과 한서형 향기 작가의 콜라보로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향기 시집>인데요.
“향기는 구체적으로 형태가 없지만, 존재한다. 오히려 구체적인 대상보다 더욱 뚜렷이 오래 이어진다.” 나태주 시인은 ‘시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를 비롯한 207편의 시는 구체적인 대상보다 선명하게 오래 남는 향기로 마음에 온기를 가득 채워줄 것입니다.
다음은 ≪너를 만나고 나를 알았다≫(마음서재, 2020)에 들어 있는 감성시인 이근대님의 시 <비 내리는 풍경>입니다.
비 내리는 풍경
이근대
비가 오는 날엔
나를 가장 따뜻하게 만날 수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창가에 앉아
음악에 젖어 차를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더없이 행복하다.
메마른 마음을 적시는 빗방울이 좋고
빗방울을 머금어 촉촉해진 마음이 좋다.
마음에 펼쳐지는 풍경이 절경이고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이 수작이다.
비가 오는 날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만날 수 있는 날
마음과 손을 잡고 공원을 걸어도 좋고
차를 몰고 산길을 달려도 좋다.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무작정 걸어도 좋고
비 내리는 풍경 속을 무심히 달려도 좋다.
빗방울이 내 마음을 두드려도 좋고
빗물이 내 눈빛을 적셔도 좋다.
한데 모여 강으로 가는 빗방울이 좋고
소용돌이치며 바다로 달려가는 강물이 좋다.
불어난 강물이 넓디넓은 바다로 흘러가듯
내 작은 눈물이 모여 꿈을 이루고
깊고 넓은 인생의 바다에서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오는 날,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옥상으로 올라가 잔잔한 풍경을 바라본다. 이마에 내려앉는 포근한 햇살이 좋고, 눈빛을 적시는 부드러운 바람이 참 좋다. 마음속으로 흘러드는 풍경이 정답고, 콧잔등에 내려온 하늘빛이 정겨워서 참 좋다.”
≪너를 만나고 나를 알았다≫에서 전하는 이근대 시인의 말인데요. 글이 풍경으로 살아나 눈앞에 펼쳐지지 않나요? 나를 가장 따뜻하게 만날 수 있는 <비 내리는 풍경>처럼 수록된 시들은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독자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줍니다.
당분간 비 소식은 없지만, 향기 좋은 생강차와 함께라면 마음도 몸도 따뜻하게 만나게 될 것 같은데요. 오늘 점심시간에는 밖으로 나가 유난히 짧은 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을 만끽해보세요.
첫 서리 내리는 달 시월, 나태주 시인의 <아끼지 마세요>와 이근대 시인의 <비 내리는 풍경>이 있는 화요일 브런치 [책담詩]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