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 떠먹는 순간, 따뜻했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겨울밤, 엄마가 담근 동치미 한 그릇이면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다.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면 속이 시원하게 뚫렸고,
무를 한입 베어 물면 아삭한 소리와 함께 달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국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깊어졌고, 마치 사이다처럼 톡 쏘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중간쯤 먹다 보면 동치미 국물은 더욱 진해지고,
그제서야 오래도록 국물 속에 담겨 있던 배가 등장한다.
껍질을 벗긴 배를 작게 썰어 무와 함께 먹으면 단맛과 아삭함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다.
우리는 한겨울 밤이면 동치미 하나만으로도 배부른 행복을 누렸다.
때론 삶은 국수를 동치미 국물에 말아 별미로 즐기기도 했고,
가끔은 무를 간장에 찍어 먹으며 그 맛을 음미했다.
무엇보다 동치미 국수는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야식이었다.
어린 나는 동치미 국수가 먹고 싶을 때마다
언니에게 재촉하며 투정을 부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국수를 먹으려면 먼저 동치미를 떠 와야 했고,
그게 문제였다. 언니는 귀찮다는 이유로 조건을 내걸었다.
“막내가 동치미 떠오면 만들어 줄게.” 나는 단번에 거부했다.
“나 혼자는 못 가!” 동치미를 뜨러 가는 일은 어린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뚫고 광까지 가는 것도 무서웠고,
커다란 항아리 속에서 동치미를 건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막내오빠를 설득해 함께 가기로 했다.
오빠와 나는 플래시와 양푼을 들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동치미 항아리는 볏짚으로 덮여 있어 뚜껑을 열 때 조심해야 했다.
잘못하면 볏짚이 동치미 속으로 들어가 국물이 흐려지기 때문이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겨울밤 공기 속으로 시원한 국물 냄새가 퍼졌다.
국자로 무를 건져 올리려 했지만 크기가 커서 자꾸 떨어졌다.
나는 결국 몸을 항아리 속으로 깊숙이 넣고 무를 낚아챘다.
미끄덩한 감촉과 함께 무가 손에서 빠져나가자 오빠는 내 발목을 붙잡고
“다시 해봐!”라고 다그쳤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무를 건져 올리자 오빠는 환호성을 질렀고,
우리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에게 동치미를 내밀며
“손 시려!”라고 엄살을 부리면,
언니는 “우리 막내 고생했네.” 하며 웃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동치미 국수를 삶아 겨울밤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었다.
동치미 국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했다.
처음에는 맑고 톡 쏘지만, 점점 하얀빛을 띠며 부드러워졌다.
그러면 어머니는 남은 동치미 무를 채 썰어 짠지처럼 무쳐 주셨다.
그 맛이 또 별미였다. 지금도 식당에서 동치미를 내놓지만,
엄마의 동치미와는 비교할 수 없다.
가게에서 내놓는 동치미는 종종 사이다를 섞어 인공적인 맛이 나곤 한다.
진짜 숙성된 동치미 국물과는 다르다.
엄마의 동치미 맛을 흉내 내보려 많이도 담가봤다.
그러나 요즘은 예전처럼 많은 양을 담그기가 쉽지 않다.
양이 적으면 국물 맛이 덜 우러나고, 무에도 제대로 맛이 배지 않는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총각무로 담그는 동치미를 시도했다.
잎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담그면 국물은 맑지 않지만,
무를 갈아 넣어 국물을 내면 엄마의 동치미와 비슷한 맛이 났다.
파란 잎사귀 덕분에 국물이 살짝 푸른빛을 띠었지만, 그 맛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지금도 동치미를 만들고 국수를 말아먹으면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음식은 단순히 맛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따뜻한 추억과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다.
내게 동치미는 단순한 김치가 아니라,
엄마의 손맛과 가족의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향수 음식이다.
비록 엄마의 맛을 완벽히 재현할 수는 없지만,
가족과 함께 동치미 한 그릇을 나누며 그 시절의 따뜻함을 다시금 되새긴다.
엄마의 동치미는 여전히 내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여러분에게도 잊을 수 없는 엄마의 손맛이 있나요?
그 음식은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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