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부터 <위플래쉬>를 봤다. 이는 내가 극장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로, 올해 재개봉 2회 관람을 추가해 총 5번을 돈 내고 봤다. 오랜만에 집에서 TV로 보니 또 뭐가 보이는가. 바로 ‘플레처’라는 존재의 본질이다. 나는 플레처를 ‘앤드류의 에고’의 상징으로 읽은 바 있는데, 오늘은 저 플레처라는 에고의 남다름이 보이는 것이다.
플레처라는 인간은 악마적으로 보이지만 에너지가 강력하다. 그게 진짜 악마(어둠)라면 진정한 에너지(빛)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악마적인 동시에 강력한 에너지인 존재는 무엇인가? 바로 에고이다. 진정한 에고, 본래적 자아. 오늘 이게 보였다.
플레처의 강력함은 그가 ‘자기 자신’이라는 데서 온다. 앤드류 또한 마찬가지다. “미친놈 대 미친놈”이라 하는 두 사람의 ‘보통 아닌’ 면모는 타자성과 섞이지 않은 ‘순도 높은 자기임’에서 비롯한다. 앤드류는 그냥 앤드류다. 플레처는 그냥 플레처다. 나는 나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둘의 관계에서 상징적으로 플레처를 앤드류의 에고라 한다면, 그 에고는 보통의 에고가 아니다. 구도의 길에서 극복하라 말하는 일차적 에고가 아니라는 뜻이다. 근원과 분리된 의식이란 뜻에서 에고의 속성을 ‘개체성’이라 하지만 사실 이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결핍감과 두려움에 지배되는 에고의 본질은 사실 (개인성이 아닌) ‘집단성’이다. 그것은 개인적 고유성이 없는 타자의식의 산물로, 무리 속에서만 존재하는(존재한다고 믿는) 허상이다.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 속 인간들은 개인성이 없기에 언제든 요원이 그 몸에 빙의할 수 있다. 이것이 일차적 에고다. 고로 극복되어야 하는 에고성의 실체는 ‘자아’가 아니라 ‘자아 없음’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플레처라는 에고는 본래적 에고, 진정한 자아이다. 그는 괴팍하고 지독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로 살아 있다. 그의 자아가 집단성에 매몰된 죽은 에고라면 그런 에너지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우선 타자의식으로 프로그래밍된 가짜 에고를 넘어선 뒤(일차적 에고 초월) 다시 진짜 에고를 길러야 한다. 집단(외부 의존성)을 넘어 개인(자기 충족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근원과 연결된 이 자족적 에고가 정립돼야 깨달음이 실체화된다.
이때의 의식은 보편성과 함께 고유성을 지니게 된다. 그제야 비로소 인간은 ‘고유한 개체’가 되는 것이다. 우주적/무경계적 의식은 유일무이한 독자성으로 구현된다. 즉, 깨달음이 육화되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탄생이다. 고로 무아(無我)나 자아 초월은 성장의 한 단계일 뿐이다. ‘자아 없음’에서 ‘자아 있음’이 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에고 없이는 셀프도 없다. 따라서 ‘죽은 에고의 죽음’ 이후 반드시 ‘본래적 에고의 탄생’이 따라야 한다. 이 살아 있는 에고성을 나는 플레처에서 보았다. 그래서 앤드류와 플레처는 마지막에 함께 웃는다.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본래적 에고와 셀프는 합작하여 공동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에 이르는 과정을 <위플래쉬>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보여준다.
‘미친 에너지’로 영화계에 <위플래쉬>가 있다면 음악계엔 스트레이 키즈가 있다. 지난주 ‘스트레이 키즈의 부활’에 이어 오늘은 ‘위플래쉬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오늘 아침 플레처에 대한 통찰과 함께, 발행 취소했던 위플래쉬 관련 글들을 다시 살렸다. 인생의 부활절이다.
<부활한 위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