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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 Sep 15. 2024

우울을 한 움큼 담은 아홉 문단

죽기 위해 산다

1

시간을 죽이고 죽여도 죽일 시간이 또 생긴다..

기쁨이나 환희 따위 없는 마지막을 향해

언제일지 감도 안 잡히는 마지막을 향해

끊임없이 시간을 죽인다

죽기 위해 시간을 죽인다

죽는 날까지 시간을 죽인다

그럴싸한 목표는 없다

죽기 위해 자고

죽기 위해 산다

2

왜 절 여기 보내셨나요

3

나는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세상도 세상인데

난 내가 제일 무섭다

4

근데 더 무서운 건 내가 자살하지 못할 거라는 거다. 엄마에게 작은 상처 하나도 못 주는데 동생은 유학 가고 하나 남은 나마저 떠나면 엄마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겠지

5

내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가 대폭 감소했음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공부만 하지 말고 재밌는 일들을 하라고 말한다. 그 사람들한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이 상황에 화가 난다.

나는 술과 잠 빼고 다 싫은데요. 있는 재미, 없는 재미 끌어모아 공부라도 하는 건데. 그 어떤 걸 해도 재미가 없음을 알기에 딱히 노력할 의욕도 안 생긴다.

너나 재밌지 난 재미없어.

6

전쟁에 비유하자면, 삶에서 닥치는 일반적인 고난은 아무리 아군의 수가 부족해도 사기가 왕성하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우울증은, 아군의 수가 적을뿐더러 사기가 바닥이다. 그냥 0이다. 설상가상, 사면초가 등등. 그냥 답이 없다.

혹은 내 앞에 길이 두 갈래, 세 갈래도 아니고 열 갈래쯤 있는데 그 길 모두 얼마 안 가 막혀있는 느낌.

7

우리 엄마는 당연히 내가 낫길 바라시니까 매일매일 ‘산책이라도 해라’ ‘밥 좀 잘 먹어라’와 같은 말들을 하신다. 그리고 그걸 할 의지가 없어지는 게 병의 증상임을 엄마도 알고 계시기에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근데 진짜 나는.. 운동도 식사도 다 너무 싫다. 못하겠다.

8

사는 게 너무너무 무섭다

아무리 인생, 진로, 결혼 같은 거 다 포기하고 부모 돈으로 먹고 산대도 싫다.. 더 이상 세상을 감당할 필요는 없어지겠지만 나를 여전히 감당해야 하잖아. 모든 걸로 불안에 떠는 나를. 머릿속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나를.

9​​

낫는 건 무섭고

낫고 싶다는 마음과 죽고 싶다는 마음이 충돌하는 건 너무 불쾌하고

사는 건 끔찍하다

가족이 죽고 시험에 떨어지고 큰 사고를 당해도 나는 기어이 다 버텨낼 것 같아서

그게 그렇게 싫다

나 너무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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