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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Nov 21. 2023

삶과 죽음을 갈라놓은 질문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수용소' 혹은 '도살장'이라 불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기차를 타고 수용소에 도착한 사람들이 친위대 고급 장교 앞에 줄지어 선다.

생과 사를 가르는 첫 번째 갈림길.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장교의 손가락 하나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까딱거리는 장교의 손가락을 보며,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바삐 움직인다.

빅터 프랭클도 예외 없이 운명의 순간을 마주한다.

장교의 손가락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오른쪽을 가리킨다.


저녁이 되었을 때 수감자들은 장교의 손가락에 담긴 깊은 뜻을 알게 된다.

왼쪽은 '화장터', 오른쪽은 일반 수용소.

화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그들은 '회교도'라 불렀다. 노동의 가치조차 없어 폐기 처분되는 사람들.

그들은 잿빛 죽음 속으로 하나둘 사라져 갔다.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빅터 프랭클의 험난한 수용소 생활이 시작된다.

몸에 털 하나 남기지 않고 다 깎인 채 벌거숭이가 되었을 때, 그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 실존의 밑바닥을 처절하게 경험한다.

그렇게 시작된 죽음의 수용소 생활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참혹했다.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해 본다.

'28:1'...그 이하...


이러다가는 가까운 장래에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것은 함께 수감된 재소자들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동료들은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이 모든 고통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동료들과 다르게 질문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이, 주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의미가 없다면 궁극적으로 이곳에 살아남는다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삶의 의미가 그와 같이 우연한 일에 좌우된다면 궁극적으로 삶의 보람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살아남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이 세상에 뭔가 '의미'라는 것이 있어,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겪고 있는 지옥의 고통에도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내가 이 지옥에 오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20세기를 휩쓸었던 '실존적 공허'.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과 지침을 주었던 모든 전통은 무너져 버렸다.

사람들은 실존적 공허와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그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이 세상에 '의미'라는 것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의미를 찾았다.


마침내 찾은 것, 그것은 '삶이 나에게 거는 기대'라는 것이었다.

더 큰 어떤 것이 나에게 부여하는 책임, 과제, 사명이다.


"내가 살아야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사명이 나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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