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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수 Jan 22. 2024

열아홉이지만, 녹내장입니다

소리없이 찾아오는 시력도둑, 녹내장

3월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글자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여러 개로 보였다. 눈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 수준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심한 난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눈이 나빠졌다고만 생각했다.


일주일 후 나는 주말을 이용해 안과에 방문했다. 시력검사를 했다. 하지만 나의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이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도수를 높여도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 선생님은 나에게 "거짓말하지 마세요. 보이는 거 말해보세요."라고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고 간호사 선생님께서는 그러면 찍어서 라도 말해보라고 했다. 아니 그렇게 하는 시력검사가 무슨 의미가 있지. 진짜 눈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왜 못 보냐는 한마디는 그때 나에게 너무 큰 상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백과사전도 읽던 내가 문제집도 못 풀 정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나도 믿기지 않았다.


그 뒤 몇 가지 검사를 더하고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시력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안구건조증이 심해져서 그런 것 같다며 인공 눈물만을 처방했다. 하지만 십수 년간 내 눈과 함께 한 나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병원에 다시 가서 큰 병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안구건조증 때문이라던 의사 선생님이 왜인지 녹내장이 의심된다며 서울대병원에 진료의뢰서를 써주었다. 그렇게 나는 서울대병원에 가게 되었다.


서울대병원에 도착해 녹내장 진료실 쪽으로 갔을 때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는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내 또래는 한 명도 없어 보였다. 사실 없었다. 대기실에는 벽면 곳곳에 녹내장에 대한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녹내장은 고령일수록 가족력이 있을수록 발병확률이 높아서 주기적인 안과 검진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주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녹내장일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많은 검사를 했다. 총 검사만 2시간 넘게 했다. 검사를 위해 넣었던 안약은 세 개까지 세다가 세는 것을 포기했고 검사종류는 일찍이 세기를 포기했다. 그렇게 길었던 검사가 끝나고 상냥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극초기 녹내장이고 지금부터 관리하지 않으면 심각해질 거라며 3개월마다 병원에 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며 안압을 높일 수 있는 행동들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진료를 받고 나오니 간호사 선생님은 나에게 '소리 없이 찾아오는 시력도둑, 녹내장!'이라고 쓰여있는 팸플릿을 주셨다. 거기에는 녹내장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각종 주의할 점, 녹내장에 좋은 음식, 나쁜 음식, 좋은 운동들이 쓰여있었다.


그렇게 나의 녹내장 생활이 시작됐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수능이 끝난 뒤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아침수영 다니기였다. 하지만 수경은 안압을 높일 수 있으니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정말 절망적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계속 생각했다. '왜 내가 녹내장일까, 벌써 녹내장이면 나는 몇 살까지 볼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검색창에 녹내장 원인, 10대 녹내장, 녹내장 치료 등등을 계속해서 검색했다. 정보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헤엄쳤다. 누구라도 내가 왜 녹내장인지 설명해줬으면 했다. 나는 가족력도 없었고 고령도 아니었고 고도 근시도 아니었으며 당뇨도 없었고 스테로이드 약물도 먹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는 '내 녹내장은 스트레스성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말이 되는 원인이 그뿐이었다.


시력이 나쁜 것도 슬픈 일이었지만 안경을 쓰면 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료제도 없고 진행되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의 노력인 녹내장은 정말 슬펐다.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스트레스는 녹내장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절대 스트레스받지 마세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은 나를 더 절망스럽게 했다. 고3에게 스트레스받지 마세요라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 선생님이 된 의사 선생님도 이건 불가능하다는 것쯤 아실 거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하다가도 눈이 보이지 않을 때면 쉬어줘야 했고 안압이 높아져 두통약은 달고 살았다. 눈을 피로하게 한 날이면 어김없이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면 더 잘 보이지 않았다. 문제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상태로 공부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야만 됐다. 건강과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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