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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범사랑북극곰 Jul 25. 2023

1번째 5일간

처음 날부터 5일째까지

1일째갱년기


사춘기 딸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보라는 전문가의 조언을 참조하여 고민 끝에 이것저것 제안했는데 모두 까였다. 까인 이유는 ‘귀찮다’, ‘재미없을 것 같다’ 등이었는데, 성의 없는 태도에 짜증이 확 나려고 했지만 그나마 깐 이유를 빙빙 돌리지 않고 솔직히 말해준 것에 위안을 삼고 꾹 참았다.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함께 3개월만 일기를 써보고 바꿔서 읽어보자는 제안은 의외로 선뜻 받아드려 주지 않았는가? 아내도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아니냐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위로해주었다... 위로... 고맙긴 한데 그렇다고 이게 위로 받을 일은 사실 아니잖아? 

내가 지금까지 자기를 금지옥엽처럼 사랑하면서 극진히 먹이고 얼마나 정성껏 키워줬는데 이까짓 일 좀 해주는 것이 그렇게 대수야? 내 참~ 더럽고 아니꼬워서 원...  


뭐~ 하여튼 약속을 한 것이 중요하니까... 

차분하게 오늘부터 일기를 쓸 것인지 물어봤더니 시험도 곧 봐야하고 ‘바빠서’ 내일부터 하시겠단다. 

하하! 아니 지가 바쁠 게 뭐가 있데? 그리고 시험 때문에 못쓰면 내일은 시험 준비기간이 아닌가? 

하여튼 제멋대로에 엉터리다!


연휴 첫날이라 평양냉면 한 그릇 먹고 명동 일대 15km 정도를 운동 삼아 걸어 다녔다. 

평소에도 1만보 걷기를 실천하고 있어서 2만보도 쉽게... 는 개뿔! 

1만보와 2만보는 천지 차이다! 다리가 많이 땅긴다. 

걷기 운동을 막내랑 함께 다니고 싶은데 가자고 하면 예전에 남산에 함께 올라갔던 악몽이 떠오른다고 성질부리겠지? 아니~ 참내~ 누가 처음부터 뛰어 올라가라고 했나? 내가 분명히 갈 길 머니까 천천히 가야한다고 말했었는데 자기가 혼자 열광하며 뛰어 올라가다 지쳐놓고... 

그래도 그때가 그립다. 하여튼 내일부터 일기 제대로 써라! 

아빠가 지켜본다! 불끈!    

                                                      



2일째사춘기


시험이 4일 남았다. 

고등학교 올라와 보는 첫 학년의 시험을 전부 말아먹고 싶지 않아 이번엔 스스로 계획을 세워 공부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근데 오늘 아빠랑 또 다퉜다. 아~ 지겨워! 내가 잘못한 걸 안다. 그래도 아빠한테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 느끼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나는 촉박하다. 

왜 공부 열심히 안했지... 젠장! 이 따위 감정들이나 생각할 시간에 단어나 더 봐야겠다.     




2일째갱년기


오늘도 막내와 툭탁거렸다. 막내와 하고 있는 이놈의 평행선상 달리기는 언제쯤 끝나려는지...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태도는 좋다. 어느 부모가 자식 공부하려는 것을 싫어하겠는가? 

그런데 음악 틀어놓고 눕다시피 한 자세로 무슨 공부를 한다는 건지... 

좋아~ 그것도 자신만의 공부 루틴이라고 치자! 그깟 공부 같지도 않은 공부하면서 아빠한테 다정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대체 뭐야? 아빠한테 잠깐 다정한 말하고 표정지어주면 공부가 안 돼? 외웠던 것이 날아가?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니 그게 더 열 받는다. 


그래! 내가 나이 값 못하고 예쁘다는 이유로 딸내미를 괴롭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해심이 부족한 것 일수도 있다. 그런데? 좀 그러면 안 되나? 어른들이 말하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이라는 표현을 실감나게 해준 존재가 막내이다. 

이 말을 들으면 큰아들 녀석이 서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첫째 놈 봤을 때는 나도 첨 해보는 아빠 노릇에 뭐가 뭔지 정신만 없었지 솔직히 자식 사랑을 제대로 잘 모르겠더라. 시간이 흘러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고 진짜 아빠 노릇하기 시작하면서 자식 예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나도 사람이다! 나는 아빠로서 자식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부모는 자식들을 일방적으로 이해해야하고 자식들의 이야기만 들어줘야하는가? 

다른 부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성인군자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다. 

나도 사람이다! 이놈아!    



                         

3일째사춘기


오늘은 공휴일이었다. 아침부터 몸이 찌뿌둥한 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서 조금만 더 빈둥빈둥~ 뒹굴뒹굴하다가... 결국 데구르르르 굴러 침대에서 뚝 떨어질 것 같아 벌떡 일어난 찰나! 아빠가 일어나라고 나를 깨웠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 ㅋ 안 깨어있었으면 아빠 목소리 못 듣고 걍~ 계속 잤을 거다. 물론 또 혼났을 것이고~ 

쬈든! 일어나서 이를 닦는 동안 어제 일을 잠깐 생각하고~ 아침에 깨워준 아빠 목소리를 다시 곱씹어보았는데, 음~ 아빠의 분노 게이지가 100은 아닌 듯하다. 안심하고 계속 이를 닦았다. 


휴일이라 그냥 더 자고 싶었고, 놀고 싶었고, 굴러다니고 싶었다. 오늘따라 밥맛도 없었고, 배도 안 고팠다. 근데 그게 아빠랑 다툰 것의 영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것 때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훠이훠이~ 생각아 가라!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브런치를 먹으러 가자고 하네? 개꿀~ 남산의 기운 때문인지, 좋은 호텔의 에너지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ㅋㅋ 럭셔리 체질?


집에 와서는 공부를 하려고 영어책을 딱 폈는데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다. 밥 먹고 왔으니 당연한... 

근데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정신을 차렸다. 아~ 대체 언제 끝나? 시험! 이것이 K고딩인가? 인생 100년 중에 얼마 살지 않은 부스러기 같은 존재같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맞다! 부스러기? 부시러기? 뭐가 되었던 부스러기도 지칠 때가 있는 듯하다. 

뭔 소리를 하는 건지 ㅋ 그만 쓰고 시험공부나 해야겠다.




3일째갱년기


어제의 앙금이 조금 남아있는지 휴일 아침에 막내를 깨우는 내 목소리가 나긋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부스스한 모습으로 힘들게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약해져서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나... 

아휴~ 이 바보야!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래서 슬그머니 하얏트 남산에 가서 브런치 먹을 것을 제안했다. 비싼 곳이지만 그만큼 화끈하게 화해하자는 뜻이지... 하하! 다행히 어제 나랑 한바탕 해놓고도 군말 없이 따라온다. 

뭐~ 사실 나와 막내 사이는 다른 심각한 사춘기 부녀지간에 비하면 정말 사이 좋은 거지~ 우리 막내만큼 착한 애가 어디 있어? 마음 같아서는 시험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 하고는 놀려주고 싶은데 잔인한 현실 때문에 마냥 놀릴 수만도 없고... 

에잉... 이놈아~ 아빠는 너와 보내는 1초, 1분, 1시간, 하루가 너무너무 소중하다. 

왜 쓸데없는 감정적 소모전을 아빠랑 하려고 하니? 미래에 우리가 헤어져야할 시간에 다가오면 모든 것이 소중한 기억일 텐데 왜 그 기억에 나쁜 감정을 남기려고 하니? 

우리 함께 하는 시간을 항상 행복하게 보내자꾸나! 아빠는 그것 밖에 소원이 없다. 응?      



                   

4일째사춘기


음~ 역시 오늘도 졸리기만 한 하루였다. 하루 종일 졸리기만 해서 큰일이다. 

일기 쓴 후 시험공부 해야 하는데 시험공부고 뭐고 일찍 잠들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든다. ㅋ 

아까 낮에도 ‘공부해야지’하고 맘먹고 우선 밥을 먹으러 부엌에 갔었다. 피클이 있었다. 피클은 눈이 위로 쭉 찢어진 악마 같은 모습처럼 느껴졌다. 밥 먹는 동안 무서운 느낌의 피클이 날 째려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언칠 뻔했다. 다음부턴 피클을 식탁에 올리지 말아달라고 말해야겠다. 

시험은 2일 남았다.     



 

4일째갱년기


막내가 피클이 악마처럼 보여 무서웠다는 말을 침을 튀기며 하는데 아무리 피클을 들여다봐도 모습이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대체 어디가 눈인지조차 모르겠다. 이 녀석의 창의력이 뛰어난 건지, 내가 극도로 둔한건지... 


모 연예인의 아버지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아들을 폭행하여  아들인 연예인이 충격에 구급차에 실려 갔다는 기사를 보았다. 큰자식만 극도로 편애하는 그 연예인 아버지 모습을 보고 혹시 나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은지 성찰하였다. 

노파심에 아내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아내는 내가 막내를 특별히 예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원체 다른 가족 모두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라 충분히 이해되는 수준이라고 말해주었다. 

다행이다. 저런 몰지각한 부모는 절대 되지 말아야지! 꼭!




5일째사춘기


컨디션이 최악이다. 화장실을 4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지금은 속까지 울렁거려 환장하겠다. 

내일 시험인데 세상이 그냥 시험을 망치라고 나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는 느낌이다. 이겨내어 주겠다. 댐벼라! 저주야! 이렇게 혼자 외치다보니 시험을 보기도 전인데 이미 시험이 끝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이상하게 맘이 편해졌다. 내가 세상을 너무 긴장감 없이 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사는 길이 이거라면 이렇게 살 거다!~^ 뭐 잘못됐음?     




5일째갱년기


막내가 컨디션이 나빠 보였다. 괜찮으냐고 여러 번 물어봤는데 그때마다 ‘응’이라는 짧은 대답뿐이었다. 

자기 엄마랑은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여성들만 공감할 수 있는 아픔 때문에 그런 거라면 할 말 없지만 괜히 섭섭하다. 물론 이성적으로야 이해도 되고 내가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것임을 잘 안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이성으로만 살아갈 수 있나?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게 아빠와 딸과의 관계인 것 같다. 물론 내가 성숙하지 못한 아빠일 수도 있고~


나 역시 오늘 일과가 많이 피곤했다. 이런저런 짜증나는 일들도 많았고, 세상도 시끄럽고... 

저녁에는 친구 성훈이를 만나서 술 한잔했다. 그렇게 친하고 재미있던 친구였는데 요새는 만나도 할 말이 그다지 없다. 만나면 “일 잘 되냐?” “건강은?” “애들은 별일 없고?” 이런 말 뿐이다. 물론 이런 말도 몇 분 지나면 끝난다. 

이럴 땐 젊은 시절이 그리워진다. 가족 이외에는 내 옆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뭐 이런 삶이 싫거나 잘못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무료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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