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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브리 Feb 25. 2024

프러포즈를 받고 망설인 이유

우리, 정말 결혼해도 될까?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부터 결혼 전까지 약 5년 반 동안 사귀었기에,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서로가 첫 연인이자 첫사랑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굉장히 로맨티시스트이자 이상주의자 같은데 사실은 완전 반대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부모님과 가까운 친한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특징 중 하나는 감정이 메말랐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평생 부족한 공감 능력을 보완해 나가려 애쓰며 살아왔다. 하지만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철벽 같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듣는 것을 생각하면 주어진 성향의 한계가 있는 듯하다.


오히려 로맨티시스트는 딱딱한 숫자로만 이루어졌을 것 같은 뼛속까지 공대생인 남편이다. 그는 작년 여름에 나에게 프러포즈를 했는데, 그가 곧 프러포즈를 할 거라는 사실은 나를 포함해 양가 가족, 친한 친구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마음 따듯한 프러포즈를 선사했다. 차를 타고 멋진 들판을 지나갈 때만 해도 긴가민가하다가, 그가 차를 세우고 나에게 눈가리개를 씌운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한참 동안 숲 속으로 이끌었다. 마침내 눈가리개를 풀자, 나의 눈앞에 그가 작은 폭포가 흐르는 절벽 위에서 무릎을 꿇고 반짝이는 반지를 들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그의 프러포즈는 완벽했다. 그는 산속에 맑은 호숫가 앞 캠핑장을 빌려서 전구 장식과 장미 꽃잎으로 장소를 꾸미고, 예쁜 소풍 바구니에 먹는 걸 좋아하는 나를 위해 코스 요리를 담아왔다. 피크닉 테이블 옆에는 모닥불이 피어있었고, 담요와 베개가 깔린 아늑한 텐트가 있었으며, 작은 폭죽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가장 놀랐던 부분은 따로 있었는데, 애피타이저 이후 메인 디시인 스테이크를 먹기 전 장소를 이동해야 한다고 해서 의아해하며 따라가 보니 호숫가 중앙, 하늘이 탁 트인 곳에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실로 동화 같은 풍경이었다.


내가 막연히 원하던 프러포즈를 몇 달에 걸쳐 준비해 준 그가 참 고마웠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반지를 건넨 순간, 황홀해야 마땅한 그 완벽한 순간에, 나는 구름 위를 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땅으로 곤두박이칠 치는 기분이었다.


그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서, 였을까? 그러나 애초에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의 형태는 감정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가족만큼 소중한 인물이고,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고, 또 행복한 존재이다. 그런 그와 평생을 산다는 것은 아마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 주는 무게감은 달랐다. 내 인생을 정말 이 한 사람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한다는 것, 무를 수 없다는 것. 결혼은 막대한 책임감을 안는 것인데, 겨우 스물 하나 먹은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맞는 건지, 감정에 치우쳐 결정한 것이 아닌지. 찰나의 순간 동안 수많은 고민이 머리를 스쳤다.


5년 가까이 사귀었으면서도 한 여름에 덜덜 떨고 있는 그를 위해 빨리 대답을 하고 싶았지만 차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 당연하고도 간결한 대답이 내 미래를 송두리째 바꾸는 힘을 가졌기에.


머뭇거림 끝내, 정해져 있던 승낙을 하자,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참 많이 미안했다. 그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큰 기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낮은 기대보다도 더 처참한 반응에 짐짓 실망한 듯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프러포즈를 받고 난 이후, 영화나 드라마라도 같이 볼 때면, 프러포즈 장면에서는 꼭 여자가 팔짝팔짝 뛰거나 울거나 하다못해 기쁨의 비명이라도 지르더라. 나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실제로 진심 어린 사과를 두어 번 했다. 그가 오해할까 두려웠다. 나는 그의 프러포즈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향한 쪽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있을 뿐인데.


미안함을 무릅쓴 채, 나의 진정한 번뇌는 프러포즈를 받고 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예비신부로서의 설렘은 미뤄두고 장장 서너 달 동안을 우리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또 고민했다. 전부터 계획해 왔던 일이라고는 했지만, 더욱더 신중하고 또 신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기회가 닿아 좋은 멘토와 만나게 되고 또 전문 상담사분께 결혼 전 상담을 받기 시작했는데, 케이스마다 다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관계를 점검하고 돌아보는 일은 결혼 준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나아가 시간이 지나며 그에 대해 더 알아가고, 그를 이해하는 방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배워가자, 점 점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불안정했던 시기가 길었던 만큼 큰 확신과 애정이 돌아오자, 그도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하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당시에 그는 정말 헤어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고 한다. 나 또한 그저 감정적으로, 순간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그와의 결혼에 대한 믿음이 생기자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해 결혼을 준비하면서 나만의 결혼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 정말 우리가 결혼해도 되는지,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먼저, 감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특히 결혼은 더더욱 하면 안 된다는 것. 오래 사귄 우리는 더 이상 매 순간 설레지 않는다. 이미 결혼 한참 전부터 주변 지인들에게 “노인 부부”라는 별칭을 들을 정도의 우리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있어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 사실은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부모님 또한 동의하는 것을 봤을 때, 그가 나에게 알맞은 사람이라는 것은 콩깍지가 아닌, 진실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서 우리가 일찍 결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기는 결혼에 있어 우선 사항은 아니라는 것. 5년 정도 지난 후에는 너도 나도 결혼 이야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하며 적령기에 점차 들어설 때이더라. 5년 전인 지금은 너무 이르나, 5년 후인 그때는 재촉하기 시작하는, 정확한 기준 없이 들이미는 사회의 잣대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나는 혼자 살 배포가 안된다. 그러기에는 겁이 너무 많다. 세상이 요새 너무 흉흉하다. 외로움도 잘 탄다.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와 결혼을 하지 않을 경우,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알아가고, 연애하고, 결혼하기 위해 쓸 에너지가 너무 아까웠다. 나는 이루고 싶은 일이 있는데, 아니, 많은데, 20대 중후반을 다양한 가능성을 펼쳐보고 미래를 다잡는데 쓰고 싶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정서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안정적인 환경이 되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스무한 살에 감히,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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