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은 아침부터 들떴다. 오늘은 기다리던 93학번 MT를 가는 날이었다.
가방에 대충 짐을 챙기며 거울 앞에 선 그는, 왠지 모르게 오늘 하루가 조금 다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옥비도 왔으면 좋겠는데...’
옥비는 기계공학과의 첫 여자 신입생이었다.
정원 150명 중 단 한 명. 입학식 날부터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영실은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아봤다. 학력고사 날, 맨 앞줄 오른쪽에 앉아 있던 긴 생머리 여학생.
안암로터리 버스 정류장에서, 김건모 노래를 함께 듣던 그 여학생이 바로 옥비였다.
하지만 영실은 아직 한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녀 곁에는 남학생들이 몰려 있었고,
심지어 선배들마저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소심한 영실에게 옥비는 너무 멀고, 빛나는 존재였다.
“영실아~ 여기야!”
청량리역 대합실에서 정규가 손을 흔들었다. 둘은 함께 기차에 올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사이다 마실래?”
영실은 정규에게 캔을 건네며 웃었다.
“고맙다. 근데 봐라, 옥비는 역시 인기 많다.”
“그러게. 난 아직 인사도 못 해봤어.”
정규는 헛웃음을 지었다.
“야, 우리 같은 얼굴은 거들떠도 안 볼 걸?”
둘은 어깨를 맞부딪치며 낄낄 웃었다. 평범한 외모의 영실, 촌스러운 정규. 둘 다 여자를 어려워했다.
“과를 잘못 골랐지 뭐. 남중, 남고에 이어 대학도 남대라니.”
정규가 새우깡을 뜯으며 말했다.
“야, 새우깡이나 먹어. 우리 같은 놈들은 여대 미팅이나 노리자.”
“본교 쪽 교양과목 들으면 여학생들 많을까?”
“사범대나 문과대 과목으로 신청하자. 무조건 거기로!”
둘은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기차를 타고 가평으로 향했다.
MT 장소에 도착하니, 계곡이 흐르고, 숲에는 새소리가 가득했다. 과대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배들 없이 우리끼리라서 좋지? 응원가부터 가자고!”
가평의 공기가 흔들릴 만큼 응원가가 터져 나왔다.
젊음의 함성 속에서 영실은 순간, ‘이게 대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원가가 끝나자 친구들은 산으로 흩어졌다. 캠프파이어용 장작을 주우러 가야 했다.
‘짐을 다 내팽개쳐놨네... 이거 정리하고 가야겠다.’
영실은 숙소 안을 정리하느라 혼자서 산으로 늦게 올라갔다.
“영실아~ 너 영실이지?”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영실은 화들짝 돌아봤다. 옥비였다.
“어? 옥비야...!”
“우리 처음 얘기하는 것 같지?”
“응, 과가 워낙 크니까.”
“나 너랑 같이 나무 주워도 돼?”
“응... 당연하지.”
그 순간 영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였고, 옥비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넌 기계과 왜 왔어?”
“점수 맞춰서 그냥... 취업이 잘 될 것 같아서.”
“난 자동차 만들려고 왔어.”
“자동차? 여자가 자동차를 만든다고?”
“응. 난 언젠가 전기자동차를 만들 거야.
기름 냄새 안 나는, 세상에서 제일 조용한 차.”
옥비의 눈빛은 또렷했다. 영실은 그 눈빛에 빨려들듯 바라보았다. 그녀가 워크맨을 꺼내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이 노래 좋아하니?”
“어, 김건모네! 나도 좋아해.”
이어폰에서는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가 흘러나왔다. 서로 다른 귀에 같은 멜로디가 스며들었다.
“너 혹시 이 노래, 예전에 나랑 같이 들었던 거 기억해?”
“언제?”
“학력고사 끝나고 안암로터리에서... 같이 버스 기다렸잖아.”
“그랬나? 난 기억 안 나. 그래도 노래는 좋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서 영실은 처음으로 누군가와 ‘시간’을 공유한다는 기쁨을 느꼈다.
그러다 옥비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나, 너한테 할 얘기 있는데...”
“뭐... 뭐야?”
영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너 초콜릿 좋아하지?”
“응? 어... 좋아해.”
“그럼 이거. 나중에, 나 멀리 가면 뜯어봐.”
옥비는 예쁘게 포장된 무언가를 건네고, 도망치듯 숙소 쪽으로 달려갔다.
조용한 숲. 햇살 한 줄기가 바위를 비추고 있었다. 영실은 바위 위에 앉아, 포장지를 조심스레 뜯었다.
그 안에는 가나 초콜릿과 향기 나는 편지 한 장. 그는 초콜릿을 한입 베어 문 채 편지를 펼쳤다.
영실아,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외모는 평범하지만, 무언가에 집중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냈어.
아직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면 끌리거든.
이번 중간고사 1등 한 친구가 정규더라.
네가 정규랑 친한 것 같던데,
오늘 밤 10시쯤 정규 좀 밖으로 불러줄 수 있을까?
편지는 거기서 끝났다. 영실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멀게 느껴졌다.
‘내가... 아니라, 정규였구나.’
손에 쥔 초콜릿이 녹아 손끝을 더럽혔다. 그는 천천히 그것을 입에 넣었다.
달콤했지만, 이상하게 쓰디썼다.
그날 이후, 옥비와 정규는 공식적인 커플이 되었고, 정규는 영실과 했던 모든 약속을 잊었다.
여대 미팅도, 문과 교양 수업도,
영실은 늘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