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옥한 땅에 괴로움이 만개하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아버지의 유산 덕에 부족함 없이 살았고, 미식을 즐겼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삶은 고통이다"이다. 그는 삶을 욕망과 권태 사이를 진자처럼 왕복운동하는 고통의 굴레라고 보았다. 만약 그가 더 부유했고, 어머니와의 관계가 원만했으며, 원하던 강좌를 맡은 인기 있는 교수가 되었더라면,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삶은 행복이다’라고 말했을까?
자신의 죽음이 이상하고 어색치 않다는 생각을 갖고 사는 나는 어떨까. 많이들 할 법한 오해는 내가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질 것이란 예상일 듯하다. 하지만 내가 선천적으로 우울하고 불안한 성향을 지님을 오히려 증명하듯, 내 성장환경은 중산층에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시는 아버지와 육아와 집안일에 전념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사이가 좋았다 나빴다 하는 누나가 있는 적당히 괜찮은 집이었다. 부모님들 사이의 불화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폭력적이거나 극단적인 신념을 가진 분들이 아니었고, 나를 돌보는 데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쏟으셨다. 집에는 늘 따뜻한 밥이 있었고, 필요하다고 느끼는 공부는 대부분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정환경이 여기서보다 더 완벽하더라도, 내 어린 시절이 행복하지 않았을 것임을 나는 느낀다. 쇼펜하우어처럼. 돈이 아무리 많아도, 가족이 아무리 더 화목해도,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잘생겼더라도 나는 내가 행복하지 않았을 것임을 직감한다. 내게 찾아오는 삶의 고통은 외부가 아닌 더 근원적으로 내부가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유아 시기(만 4세~6세)의 나는 이미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린이집을 처음 등원하던 날 분리불안으로 어머니랑 떨어지기 싫어 등원버스에 억지로 실리며 울었던 기억이다. 친구를 잘 사귀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어머니의 말로는 같이 길을 가다 친구가 아는 척을 해도 기억을 못 하며 다리 뒤로 숨었다고 한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정보를 잘 기억지 못하고 무관심한 태도는 계속 이어진다. 이 시기에 있던 분리불안 또한 꽤 오래 지속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가 일상과 달리 자리를 비울 일이 있으면 전화기를 붙들고 언제 오냐며 계속 재촉하곤 했다. 전화를 안 받으면 교통사고라도 난 것은 아닌지에 불안을 겪었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심한 분리불안은 사라졌다. 다만 부족한 사회성과 예민함, 평가불안이 두드러졌다. 대부분의 시기를 사람과 함께 보내기보다는 책과 함께 보냈다. 쉬는 시간에는 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으며 점심시간에는 도서관이 열리기 전부터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인간은 책에 비해 대하기 너무나 고생스러웠다. 예민한 성향 탓에 시끄럽거나 냄새나는 친구를 대놓고 싫어했고 이것 때문에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그러는 한편 타인의 시선을 일찍이부터 의식하고 그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날 입은 옷이 맘에 안 들거나 머리가 이상할 때, 심지어 빨래가 안 말라 맘에 드는 양말이 없을 때는 등교하기를 거부해서 어머니가 고생하기도 했다. 이는 선천적 예민함도 원인이었지만 어머니가 무신경하게 외모 지적을 자주 하셨던 것이 주된 이유이었다. 당시 덧니가 심했던 나는, 어머니의 반복적인 외모 지적을 ‘걱정’이 아니라 ‘평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이러한 무신경함은 이후의 시기에도 내게 심적 어려움을 겪게 하곤 한다. 어머님의 잦은 지적과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 겹쳐 극심한 평가불안을 겪었다. 학교에 가면 주변 친구들의 평가와 선생님께 혼날 것이 항상 두려웠다. 즉, 나는 발표도 공포였고 규칙을 어기는 것도 공포였으며 준비물을 챙기지 않았을지에 대해 과한 두려움을 겪었다. 이는 학교에 갈 때마다 불안으로 과민성대장증후군을 만성적으로 앓게 했다. 초등학교 특유의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면 놀리는 문화와 겹쳐 하루 종일 창백해지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변을 참다 집에 와서 쏟아내곤 했다. 학교 다니는 것이 즐거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다.
중학교를 올라와 1학년을 다니고 2, 3학년은 서울로 올라와서 다니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내 성향과 과민성대장증후군은 여전히 날 괴롭게 했다. 특히 중학교로 올라오며 하나 둘 불량하고 남을 괴롭히는 학생들이 나타나며 학교에 가는 것이 더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러던 중에 3학년 때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다. 같은 반에 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충동적이고 폭력성이 강한 아이가 있었고, 나는 소위 그 아이에게 찍혀 집중적인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괴롭힘의 이유는 합당하진 않으나 명확했다. 그 아이는 주변 학생들에게 갈등을 유도하며 싸움을 벌이려 했다. 내가 그런 모습을 좋아할 리가 만무함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해할 것이다. 나는 3학년 때 대놓고 그 아이를 싫어했고 녀석은 그런 나를 적극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살집이 꽤 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담배 냄새를 풍기는 그 아이에게 매일 언어폭력을 당하는 것은 당연했고, 사소하지만 거슬리는 행동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자 점점 폭력까지 행사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배드민턴 같은 조가 되었을 때 실력이 나쁘다며 배드민턴 채를 세로로 새워 머리를 후려 맞은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는 싫었고, 주변의 친구들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 배드민턴 채에 후려쳐진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당했던 일들을 일시별로 세세히 작성하여 선생님께 제출했다. 키가 작고 안경을 낀, 젊은 여선생님이었던 담임선생님께서는 다음날 종례시간에 그 아이를 불러내어 남으라고 하시며 면담을 진행하셨다. 그 이후로 대부분의 괴롭힘은 사라졌다. 다만 부모님께 알리고 싶지 않다는 내 요청에 의해 그 외의 조치는 없었고 그저 같은 공간에서 서로 피하며 지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공부를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고 등급이 나열된 성적표는 내가 불합리한 대우를 당할 존재가 아니라는 거의 유일한 증거였다. 공부에 재능이 있었고 전교 1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허무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나에게 주어진 연명치료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은 통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비교적 무난한 편에 속했을 것이다. 안정적인 가정과 학업 성취가 있었고, 극단적인 결핍은 없었다. 물론 학교에서는 불안했고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들보다 먼저, 내 안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괴로움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