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등지고 출근한다. 무더운 여름 해를 정통으로 맞으며 출근하지 않은 일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해는 눈이 부시다. 사실 바라볼 수가 없다. 태양을 올려다보아도 어두운 잔영만 곳곳에 남아 눈이 시리고 아프다. 얼룩덜룩 나의 창에는 먼지만 묻는다. 다행히 뒤에 해가 있다면 그럴 일이 없다.
내 그림자는 나보다 앞서 걷는다. 그림자는 나와 다를까 하는 생각에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내가 앞으로 가려고 오른발을 뻗으면 그림자도 동시에 발을 뻗는다. 팔을 들어도 마찬가지다. 다른 방향을 보다가 재빨리 그림자를 바라보면 눈, 코, 입은 없어도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나가던 이가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림자를 보고 걷는 것. 나를 자세히 볼 수 있어서일까. 어쩌면 더욱 좋아 보인다. 아무도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듯 그림자가 뒤에 있었다면 더 나았을까. 대장이 되어 무엇이든 해낼 것만 같았던 이십 대 때는 그림자가 뒤에 있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특히, 돈 버는 일이라는 자체보다도 내가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나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는 요즘 같은 때에 그림자는 뒤보다 앞에 있고 나를 볼 수 있음이 좋다. 그림자의 발걸음이 신났나 보다. 빠른 걸음걸이, 그림자의 어깨가 들썩인다.
그림자 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집 앞 길다란 감나무길은 우리집의 핫플레이스다. 뜨거운 여름에도 감나무들이 줄지어 가로수로 심어져 있으니 바람과 더해져 더위를 잊을 수 있다. 나무그늘 사이의 햇볕은 그림자놀이를 할 만큼 넓었다. 해 반대방향으로 끝없이 달리면 술래는 그림자를 밟을 수 없었다. 어쩌다 밟을 것 같아도 나무그늘에 숨으면 된다. 얼른 따라가서 밟으려 하다가도 앞에서 드리워진 감나무의 그림자는 늘 술래를 속상하게 했다. 그러면 어떠랴.
속 깊은 친구들은 모르는 척 슬며시 자신의 그림자를 내놓는다. 대놓고 술래를 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술래는 뒤바뀐다. 술래였던 아이도 잡았다는 마음에 신나게 뛰어간다. 또다시 그림자 놀이는 시작된다. 술래가 몇 차례 뒤바뀌면서 더워지면 줄지어 놓여있던 화강암 돌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금새 땀이 식는다.
감나무의 파란 향기를 맡으면서 바람을 쐬고 있으면 어느새 소꿉놀이가 시작된다. 풀과 씨앗들로 여러 음식을 만들고 감나무 잎으로 그릇을 만든다. 감나무 삭정이들로 나무젓가락을 만들어 훌륭한 밥상을 차린다. 누군가는 엄마가 되고, 누군가는 아빠가 되어 요리하고 회사를 다녀온다. 아이역 할을 맡은 누군가는 ‘응애응애’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에게 밥 달라고 소리 지른다.
누군가 말한다. “해가 지고 있어.”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고 나서야 아이들은 다시 그림자 놀이를 한다. 이번엔 술래가 밟는 놀이가 아니다. 그림자가 저 멀리 달아난 감나무 아래로 모여선다. 해가 기울 때 그림자는 롱 다리가 된다. 누구의 다리가 길어지나, 누구의 머리가 길쭉한가, 누구의 팔이 긴가 자랑한다. 이리 씰룩 저리 씰룩 하는 동안 그림자들도 한참 춤을 춘다. 대여섯 명이 모인 그림자들로 희한한 생명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리가 넷 달린 사람이나 열두 개의 문어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한다.
더 이상 그림자 놀이가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노는 그 자체가 신난다. 집안에서 할 수 없던 것들을 친구들과 모여 떠들며 즐겁다. “경미야 밥 먹자.”를 필두로 엄마들의 부름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아쉬워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어둑한 얼굴들은 인사를 한다. 아이들은 꼬르륵 소리 나는 배를 움켜쥐고 얼른 각자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미 해는 없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이들의 그림자도 없고, 아이들도 없다.
조그마한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우리 집 감나무 길 앞은 이제 더 이상 크지 않다. 대여섯 명이 놀이해도 넓다란 길이었는데, 이제는 길도 좁고, 나무도 늙고, 나도 컸다. 아이들도 없다. 아이들은 각자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나 역시도 내가 가야 할 길로 들어선 지 한참이다. 그렇게 우리는 성인이 되고, 부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