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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퀸 May 21. 2024

시간 거래


지겹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 부모님이 싸질러 놓은 똥을 왜 내가 치워야 하는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점점 가속도가 붙는 사채빚은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빛의 속도로 늘어가고 내가 갚아나가는 속도는 거북이걸음이다. 아니 달팽이다. 이번 생은 망했다.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죽자!


그래 마포대교다. 많은 사람들이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릴 때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은 이생을 못 떠나고 주변에서 머문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여기서 뛰어내리면 귀신들이 내 벗이 되어주려나.

   

'밥은 먹었어?'

마포대교 초입구에 발을 들여놓자 난간에 불이 들어오며 문구가 뜬다.

'요즘 바빠?'

언제부터 이런 문구를 만들어놓은 걸까?

'별일 없지?'

센서가 설치되어있나 보다.

  

살짝 입술이 떨리고 마음이 뭉클해진다. 하지만, 3초도 안되어 갑자기 화가 부르르 내 머리로 올라온다. 별일 없냐고? 난 별일 있다. 죽을 일. 이따위 문구로 사람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있을 것 같으면 더 이상 자살소식은 없겠네. 누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그 인간의 머리통을 죽장으로 세게 후려치며 좀 더 도움이 될만한 걸로 바꿔보라고 소리치고 싶다. 가령, '당신의 빚을 갚아드립니다' 이런 거.


"내가 빚을 갚아주지."

"?"

내가 미쳤나? 너무 열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죽을 결심을 해서 그런지 이젠 헛것이 들린다. 죽음 앞에선 다들 환청을 듣는 건가? 아님 내가 곧 죽을 걸 알고 귀신들이 벌써 나에게 말을 붙이는 건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내가 빚을 갚아준다고."

어허, 이젠 산신령도 보이네. 환영과 환청. 이젠 올 게 오는구나. 빨리 끝내자.


"어허! 이 사람!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듣나. 내가 자네 빚을 다 갚아주겠다고!"

"네?"

허연 수염의 산신령이 아귀 같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움켜쥔다. 그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내 어깨를 파고든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서자 그가 나를 자신의 코 앞으로 바짝 끌어당긴다. 산신령 같은 노인의 쭈글쭈글한 눈가 주름이 보이는 걸 보니 귀신은 아닌 것 같다. 살과 피를 가진 진짜 살아있는 노인이 맞는 것 같다.   


"어르신, 저를 아십니까? 제가 빚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십니까?"

"아니, 그거야 뻔한 거 아닌가? 여기서 죽으려고 하는 걸 보면 돈 문제 말고 달리 뭔 이유가 있겠는가. 돈이 웬수지."

"저는 어르신을 모르는데 왜 저를 도와주시려고 그러십니까?" 코끝이 갑자기 시리고 무언가 목구멍에서 울컥하고 넘어온다.

"내가 좀 돈이 많거든. 많아도 너무 많아. 그런데 돈이 있으면 뭐 하나?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걸. 그래서 이 돈으로 아주 귀한 걸 사볼까 하고. 아, 물론 돈을 주는 게 공짜는 아니야. 조건이 있지."

"조건이요? 무슨...?"

"자네도 보다시피 난 이 땅에서 살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그래서 돈으로 시간을 사려고 하는 게지."

"네?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간단한 일일세. 내가 자네 시간을 사겠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갑자기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에 내가 벌써 죽었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자네가 시간과 돈을 맞교환하는 거에 동의하기만 하면 내가 자네 빚을 다 갚아주고 자넬 하루아침에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 놓을 걸세. 어떤가? 나와 계약서를 쓰겠나?"

"그게... 저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럼 제 모든 빚이 청산되고 부자로 살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시간을 드려야 하는 건지."

"어떻게는 걱정하지 말게. 그건 내가 다 알아서 가져갈 테니. 자넨 이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된다네. 그럼 자넨 내일 아침에 엄청난 부자로 눈을 뜨게 되는 거지."


이 노인은 천사가 틀림없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황당무계한 거래를 할 수 있겠는가. 분명 천사다. 방금 전까지 빚에 짓눌려 죽으려고 하던 마당에 이게 웬 횡재인가. 내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으면서도 환상적인 일인가. 부자가 되고 싶다. 더 이상 빚에 쪼들리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비단옷을 입고, 전 세계를 마음껏 누비며 살고 싶다. 나를 빚더미에 앉게 한 원수 같은 부모님이지만 두 분도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 내 이 두 손으로, 내 능력으로. 만약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부모님은 날 자랑스러워하시고 존경하며 내게 고개를 숙이시겠지. 나를 괴롭혔던 빚쟁이들은 어떠한가. 나를 무시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 내 발아래 굽신거리겠군. 돈이 없다는 이유로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아름다운 여인들을 내가 다 사들이겠어. 여자들이 이제 내게 잘 보이기 위해 몸을 스크류바같이 꼬며 '오빠, 오빠~' 코맹맹이 소리를 내겠지?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인하겠습니다. 어르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 마음은 하늘을 나는 깃털처럼 가볍다. 나를 짓누르던 모든 걱정, 근심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내 앞엔 황금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 노인은 천사가 틀림없다. 아! 나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아니, 내가 오히려 고맙지. 정말 고맙네." 그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그의 깡마른 갈퀴 같은 손이 어찌나 차갑던지 내 온몸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에 얼음송곳이 꽂히는 것 같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내 손이 마치 남의 것인 양 포르르 떨린다. 이 사인 한방에 내 인생이 시궁창에서 궁전으로 바뀔 거란 흥분 때문인지 이제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기쁨으로 흔들린다. 심하게 떨리는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아 진정시키려 해도 누를 수 없는 이해 못 할 이상한 감정이 내 머리카락까지 쭈뼛 세워버린다.


"아참. 젊은이. 자네에게 한 가지 말해둬야 할 게 있네."

"네? 혹시 이 계약을 무효로 하자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이제 세상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빼앗기고 싶진 않다.

"응. 자네는 내가 약속한 대로 자고 일어나면 내일 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어 있을 거야. 그건 걱정 말게. 하지만, 한 가지 자네를 위해서 충고해 주도록 하지."

"충고요?"

"내일부터 자네는 시간을 많이 가진 젊은 친구를 부지런히 찾아야 할 게야."

"네?" 무슨 소리인지, 왜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을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이 모든 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데.

"그럼, 오늘 밤 좋은 꿈 꾸게나."


*   *   *


내 몸을 감싼 이 부드러운 느낌과 코를 간질이는 좋은 향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어제 이상한 꿈을 꾼 것도 같고... 분명 마포대교에서 떨어지진 않았다. 지금 피부로 느끼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걸 보니 살아있는 것이겠지. 이제 눈을 뜨면 난 어떤 광경을 보게 될까?


두려움과 설레는 마음으로 천천히 뜬 내 눈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온다. 신부의 웨딩드레스처럼 하얀 레이스 커튼과 그 위에서 물결처럼 부드럽게 떨어지는 황금빛 실크커튼. 저 옛날 전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 왕국의 승리의 역사를 새겨놓은 듯한 위엄 있는 붉은 카펫. 여기저기 벽에 걸린 익숙한 명화들. 나폴레옹 황제가 앉았을 법한 소파와 우아한 의자의 곡선들이 눈을 가득 채운다. 내 몸은 푹신한 침대 위에 실크이불로 덮여있다.


아! 그 노인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일어나셨어요?" 내 옆에서 부스럭대며 한 여인이 꿀송이 같은 목소리를 뚝뚝 떨어뜨린다.   

이건 도대체 뭐지? 이 젊은 여인은 누구지?


화들짝 놀란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옆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만류한다.

"여보, 그냥 누워계세요. 제가 하인들을 시켜서 아침을 가져오라고 할게요."


이 여인이 내 아내라고? 뭐가 뭔지. 내가 언제 결혼을? 그 노인이 나에게 돈뿐만 아니라 여인까지 준 것인가? 여기가 천국이군.

   

난, 이 여인의 아름다에 취해 그녀의 뺨을 만지려 손을 뻗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손이 마비된 것 같이 내 뜻대로 잘 올라가지 않는다. 내 뜻을 알아챈 이 여인, 아니 내 아내라고 여겨지는 여인은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고 자신의 복숭아 뺨에 내 손을 살포시 갖다 댄다.

"아~" 부드러움에 취한 난 뭔가 말하려다가 튀어나온 내 목소리에 생경함을 느낀다. 이건 내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걸까? 바로 앳되고 아름다운 소녀들이 침대 쪽으로 은쟁반에 담긴 무엇인가 가지고 다가온다. 아침식사. 이런 호사를 다 누려보는군. 침대에서의 아침식사라. 난 몸을 일으켜 앉으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직도 잠이 덜 깼나 보다. 온몸에 힘이 없는 걸 보니.


재빠르게 다가와 내가 앉을 수 있도록 몸을 일으켜주는 소녀의 부드러운 손길과 향긋한 젊음의 냄새가 살포시 내 코와 살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 너무 나른해져서 다시 눕고 싶다. 다시 쏟아지는 잠을 뒤로하고 겨우 정신을 차린다. 그런데 나에게 바짝 붙어 침대에 같이 걸터앉은 소녀는 나에게 묽은 수프를 떠서 내 입에 넣어주려 한다. 이게 뭐람? 부자들은 식사도 제 손으로 못하는 게으름뱅이란 말인가? 부끄러워진 난 스스로 먹어야겠단 생각에 스푼을 잡으려 손을 뻗는다.

그 순간, 난 본다. 쭈글쭈글하고 뼈다귀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한 손을.


노인의 손!


설마? 떨리는 두 손을 내 얼굴로 가져간다. 그리고 느낀다. 덥수룩한 수염과 퀭한 두 눈두덩이, 그리고 두 볼과 눈주위에서 느껴지는 겹겹의 굴곡들.


공포가 날 덮친다!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마저 힘을 잃은 듯하다. 꺼이꺼이하고 기괴한 소리만 나올 뿐. 노인의 마지막 충고가 지옥 한가운데서 올라온다.


"내일부터 자네는 시간을 많이 가진 젊은 친구를 부지런히 찾아야 할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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