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육아, 다 잡는 건 욕심일까?
이번에 진짜 복직 안 해도 후회하지 않겠어?
남편이 문득 내게 복직시기에 대해 물었다. 분명히 7년간 장기 육아휴직하기로 얘기 끝났는데, 갑자기 웬 복직타령인가 싶었다. 남편은 혹시나 그 사이 내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승진 시기가 한참 뒤로 밀리니 복직 타이밍을 다시 한번 고민해 보라고 했다. 비록 셋째가 100일밖에 안 되긴 했지만, 남편도 휴직 중이고, 저녁마다 아이 돌봄 선생님도 오시니 복직이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었다.
남편의 염려에 친한 동기에게 최근 승진자 명단을 공유받았다. 이번에 승진한 명단 중 동기들도 포함돼 있었다. 무려 7명씩이나 말이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명단을 보자 전에 없던 조급함이 밀려왔다. '승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육아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라며 고고하게 외쳤건만, 승진자 명단에 아는 이름들이 보이자 그간의 결심들이 다시 리셋되어 버렸다.
"7월 정기인사 때 복직하려면, 5월 중순까지 복직 신청하세요"
인사팀에 복직 신청 데드라인까지 전해 듣자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마감효과 때문인가, 마치 '복직'이 홈쇼핑 매진임박 상품인 것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곧 정년을 앞두고 있으니, 지금 들어가면 2~3년 내에 승진할 수 있겠지? 그럼 내가 바라던 대로 첫째 초등학교 1학년 때 함께 있어줄 수 있을 거야.'라는 꿈같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쫙 펼쳐졌다.
휴직 이후 회사 쪽으로 쳐다도 안 본 사람이, '복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꽂히니, 마치 온 우주가 내게 복직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육아휴직 중인 남편과 저녁마다 오시는 아이 돌봄 선생님, 그리고 곧 집 근처에서 개통될 지하철이 복직을 해도 괜찮을 당위성이 되어줬다. 매일 겪게 될 지옥철과 편도 1시간 이상의 출퇴근길쯤이야 그리 큰 시련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최소 몇 년간의 삶이 결정되는 문제니, 신중하게 결정해"
긍정회로 풀가동하며, 복직 신청서에 도장 찍을 뻔한 나를 멈춰 세운 건 다름 아닌 내 첫 사수였다. 선배는 주변에 삼 남매를 키우는 직원을 예로 들며, 복직하면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거라고 했다. 아무리 남편이 복직을 지지해 줬더라도, 서로 힘들면 자주 부딪힐 거고, 하루 2시간 일찍 퇴근하는 육아시간을 쓰지 못하는 상황도 많을 거라고 했다.
또 승진이라는 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게 아니니,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그동안 2년 간의 달콤하고 안락한 휴직생활에 빠져, 전쟁 같았던 워킹라이프를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저녁 9시에 세 아이를 다 재우고, 기진맥진 안방으로 돌아오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남편과 같이 휴직하면서도 아이 셋 케어하기가 이렇게 힘든데, 여기에 일까지 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오전까지만 해도 복직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확신에 차던 사람은 저녁 무렵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복직을 부담으로 느끼는 육아에 지친 엄마가 홀로 남아있었다.
문득 5년 전, 첫째 임신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난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휴직을 하면 승진자 명단에서 제외가 되니, 출산휴가 3개월만 마치고 복직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출산휴가만 다녀오겠다는 내게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했다. 일과 육아를 다 잡는 건 욕심이라며, 승진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힘쓰라고 했다.
일과 육아, 둘 다 잡는 건 욕심일까?
예전엔 '일과 육아를 다 잡겠다는 건 욕심'이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었다. 욕심이든 말든, 내가 할 수 있다는 데 주변에서 왈가불가하는 게 마땅치 않게 들렸다. 그런데 일하는 엄마로 2년 정도 지내다 보니 일과 육아, 둘 다 잘하려고 하는 건 욕심이 맞았다. 나는 그대로인데, 아이가 하나 생겼다는 이유로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눈치가 보였다.
일도 육아도 다 놓치는 것 같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애도 키우면서 일도 하는 워킹맘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들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모든 걸 다 쏟아낸 날 밤에 마주하는 건 '잘했다'는 만족감이 아닌 '이게 맞나?' 하는 회의감이었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그게 욕심이든 아니든, 그대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육아와 일을 함께 잘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둘 중 하나만 하기로 했다. 둘 다 잘하려고 하다간 더 큰 걸 놓친다는 걸 이미 겪어봤으니 말이다. 엄마의 역할과 자신의 커리어 중 무엇을 우선할 건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당분간 엄마의 역할에 집중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욕심이라고 인정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애들 키우다가 승진이 늦었다며 한탄했겠지만, 둘 다 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니, 승진이 늦어지는 상황이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가 있으면 승진은 늦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또 직전까지 복직을 고민하다가 한 휴직이기에, 어제와 오늘의 휴직이 다르게 느껴졌다. 승진이라는 기회비용을 버리고 선택한 휴직이기에, 이 시간을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나와 아이들, 우리 가족을 위해 알차게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예전에는 욕심을 욕심이라고 인정하고 멈추는 게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한계 짓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욕심을 욕심이라고 받아들이고 내려놓는 건, 긍정적인 삶을 향한 태도이자 용기, 그리고 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