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의 자녀들과 만난 할머니
할머니의 첫 손주였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늘 할머니의 1순위였다. 할머니는 맛있는 게 있으면 나를 가장 먼저 챙겨줬고,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생겨도 할머니는 늘 나를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할머니와 관계가 좋으니,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할머니를 자주 찾아뵀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챙길 가족이 많아져 이전처럼 할머니를 찾아뵙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어제 오랜만에 할머니댁에 갔다. 결혼 후 세 번째 방문이었다. 첫 번째는 결혼하자마자 첫 명절에 인사를 드리러 갔었고, 두 번째는 첫째를 낳고, 첫째와 함께 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무려 셋째까지 낳고 찾아간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큰 아빠네 살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 근처 1층의 작은 원룸에서 혼자 생활하셨다.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싱크대가 있고, 한 평 남짓한 방이 나왔다. 우리 다섯 식구가 들어가니 방 하나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뵙다 보니, 할머니를 뵙는 게 조금 낯설고, 어색하기도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전혀 그런 내색이 없이, 3년 만에 보는 손녀를 마치 3일 전에 본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봐줬다. 귀염둥이 증손주 3명을 줄줄이 데려갔건만, 할머니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다름 아닌 나였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도, 난 여전히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첫 손주였다.
어린 시절 맛있는 게 있으면 나를 챙겨주던 할머니는, 이젠 증손주에게 주려고 이것저것을 챙겨두셨다. 바나나와 요플레, 그리고 우유까지. 아이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두셨다. 남편이 밖에 나가 먹을 걸 포장해 오는 사이, 할머니는 코 박고 요플레를 먹는 아기들을 둘러보다 나를 보며 "장하다"라고 한 마디 건네셨다.
할머니의 귀여운 똥강아지가 가정도 꾸리고, 자기 닮은 아기 셋을 낳아 왔으니, 할머니 눈에는 그저 장하고, 대견해 보였나 보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 그간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할머니 무릎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던 소녀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등을 물어보고, 결혼 후 연락이 뜸해진 친척들의 소식도 전해 들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사촌 동생들은 거기에서 결혼해 벌써 엄마, 아빠가 됐고, 박사학위 받으며 공부하던 사촌언니는 최근 교수에 임용됐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결혼했을 때만 해도 초등학생이었던 늦둥이 막내 동생도 이제 곧 군대를 간다고 했다. 내가 애 낳고 키우는 동안, 사촌들도 각기 자신의 삶을 부지런히 살고 있었다.
남편이 포장해 온 갈비탕을 먹으며 우리는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이가 안 좋은 할머니를 위해 갈비를 잘게 잘라주는 남편을 보며, 할머니는 연신 손주 사위가 다정하다며, 시집을 잘 갔다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셨다. 그 말을 들은 손주 사위는 부끄러운지 귀까지 빨개졌고, 나는 괜히 할머니 앞에서 어깨가 으쓱했다.
30분 같은 3시간이 지나니, 아이들은 집에 가자며 보채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등쌀에 떠밀려 우리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리고 가기 전 할머니께 준비한 용돈 봉투를 건넸다. 그러자 할머니도 주섬주섬 봉투를 꺼내셨다. 봉투 위에는 커다란 글씨로 '할머니'가 쓰여있었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주는 용돈 봉투였다.
아빠는 지금껏 할머니한테 용돈을 드리기만 했지,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할머니에게 손녀는 자식과는 또 다른 존재인가 보다. 손녀가 서른 중반의 어엿한 사회인이 됐어도 여전히 용돈을 주고 싶으신 걸 보면 말이다. 하얀 봉투에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한참 봉투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떠나기 전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안으며, 다음에 또 올 테니 건강하시라고 인사드렸다. 그리고 할머니는 우리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셨다. 사이드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할머니를 보니, 갑자기 마음이 한편이 울렁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앞으로 일 년에 한 번씩은 할머니를 찾아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