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도 그 시간에 갇혀 있단 걸 넌 모를 거야
".... 이레야.."
".... 미안해 성찬아"
"왜 네가 사과를 해... 나 그 소리 들으려고 한 거 아니야"
"......"
"그만할까?"
여름 장마가 무섭게 시작하던 그날 여름, 그들은 이별을 맞이했다. 이제 지쳤으니 그만하자고.
윤이레, 이성찬.
첫 만남은 영화 속처럼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피아니스트 윤이레와 피아노 조율사 이성찬, 이들은 말 그대로 비즈니스 관계로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레는 커리어를 열심히 쌓아 올려 뉴욕까지 진출할 만큼 피아노 천재라 불렸고, 그의 스승이 조율사를 하나 연결시켜 주었다. 피아니스트는 조율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레는 성찬을 처음 봤을 때, 순간적으로 마음이 쏠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 저기... 성찬 씨"
"네?"
"애인 있어요?"
다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라 성찬은 머쓱한 듯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마저도 이레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성찬은 깔끔한 성격이라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그의 완벽함은 이레의 마음에 들기 충분했다. 완벽주의자들의 만남은 마치 드라마틱했다.
떨리다면 떨릴 법한 뉴욕의 단독 첫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고 이레는 성찬을 붙잡고 이야기를 시도했다.
"한국분이신 듯한데, 저랑 한국에서도 공연할래요?"
"..... 그 말은?"
"저랑 계약해요 성찬 씨"
그렇게 떨어질 수야 없는 계약서로 묶인 관계가 되었다. 이렇게라도 이레는 성찬을 잡아두고 싶었다. 줄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사람인 게 맞았으니까.
공연을 다니면서 피아노 조율은 실수가 없었고 종종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었다. 홀로 외로이 연습하던 이레에게 청자가 생긴 것이었다.
"제 연주 어땠어요?"
밝게 웃어 보이며 성찬은 답했다.
"아름다웠어요"
"말 편하게 해요 나랑 동갑이라 들었어요"
"아.. 혹시 23살이에요?"
"네"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이제는 둘밖에 없는 솔메이트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공연을 둘이 같이 다니고 이레 덕분에 성찬도 실력 있는 조율사라고 극찬을 들었다.
"매번 너 덕분에 고맙다 이레야"
"고마우면, 내 거 하던가"
"어?"
"뭘 그리 당황을 해? 내가 마음 있단 거 너 모르는 사실도 아니었잖아"
"....."
성찬은 당돌한 이레의 고백 아닌 고백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런 걸로 장난칠 애가 아닌 것을 알았기에 고민하더니 답했다.
"으음... 생각해 보고 말해줄게"
"나 싫어?"
"그건 아니야"
"그럼 결정할 수 있잖아"
이레는 성찬을 원했다. 그렇기에 하루라도 자신의 곁에 꼭 붙여두고 싶었지만 거절을 한다면 이레도 아마 좌절감에 빠질지도.
"..... 그래"
이레는 긍정의 대답을 듣고 화색 하며 성찬을 끌어당겨 안았다. 이레와 성찬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로맨틱하게 연인이 되었다.
한시라도 떨어질 법이 없었다. 2년째 알콩달콩 하던 연인. 어느 날, 그 연인에게도 시련이 닥쳐온다. 바로 이레의 합동 공연과 성찬의 부재. 성찬은 이레만 전속으로 봐주기엔 힘들었다. 실력이 뜬 후로 이리저리 불러주는 데가 늘어났으니까. 이레 입장에선 서운함이 가득했다.
자신의 조율사로 두고 싶어서 사귀자고 했던 것도 맞았으니까.
성찬도 그에 대한 미안함이 커져갔지만,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단계라 거절하기 쉽지 않았고, 결국 일이 터졌다.
-성찬아 오늘 바빠?-
-응.. 미안 갑자기 일이 잡혀서-
-우리 오늘 4주년 기념일이야-
-미안 일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
정인지 사랑인지도 모를 이 길고 긴 연애를 4년을 끌었다. 그렇다고 이레는 성찬과 이별을 하면 너무 그 시간들을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 헤어지잔 말을 꾹 참은 채 문자에 알겠다고 답을 넣었다.
성찬의 미팅 후 시간은 열두 시. 이미 뭘 사가기엔 늦은 것 같아서 서둘러 이레의 집으로 향했다.
"이레야!"
문을 두드리자 그 안엔 눈을 비비고 문을 열어주는 이레가 있었다. 울었는지 눈가는 부풀어 있었다.
성찬은 그제야 내가 애를 혼자 뒀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아차 싶었다.
"성찬아.."
"응 이레야"
한없이 목소리는 다정해서 그게 또 마음이 아픈 이레였다.
"우리 몇 년 만났지?"
"... 4년"
"그래.. 그게 이렇게 짧은 기간이 아니잖아.. 근데, 시간 좀 내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
"...."
"그래, 너 바쁜 거 이해 못 해주는 거 아니야, 나 오늘 너랑 기념일이라고 저녁 레스토랑도 잡고 방도 다 잡아뒀는데 취소하는 거 문제는 되겠지만 크진 않아. 큰 문제가 뭔 줄 알아?"
"... 알아"
"그래, 네가... 우리 사랑과 마음을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다린 내가 비참한 거야"
이레는 눈물을 쏟아부으며 말을 다 토해냈다. 이제 피아노의 아름다움이 없음을 깨달은 이레는 정체기가 왔고,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그는 자신에게서 멀어져만 가는 느낌을 받았다.
성찬은 이내 입을 열었다.
"...... 그럼 우리 여기서 그만하자.."
그만하자라는 말에 이레는 성찬을 붙잡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서 너무 감정 소모를 많이 한 나머지 붙잡지 못했다. 그렇게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레는 성찬과 헤어지고, 성찬이 짐을 챙겨 나가는 그 순간마저도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다. 성찬은 씁쓸하게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하며 나가버렸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싶었던 이레는 그 자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 넌 모를 거야 네가 잠든 사이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이야.."
"사랑했고 고마웠고 잘 지내"
"우리의 연애는 평범하다면 평범했지만 특별하다면 특별했어.."
"안녕.. 성찬아"
이레는 소파에 앉아 독백을 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아프디 아프던 이별은 두 사람에게 힘든 시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