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9. 널 사랑하니까 내 전부니까 上

下편은 10화입니다. 너에게 빠진 순간부터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by 규린

.


"너에게 빠진 순간부터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명문대로 손꼽히는 한국대학교 회계학과 19학번 민하준. 그는 과대도 도맡아 하고 상경대학 학생장도 하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엄친아이다. 차갑고 까탈스럽게 생긴 첫인상지만, 말을 놓고 이야기를 트기 시작하면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

그런 그의 다정한 모습에 경영학과 김채은이 반했다.

경영학과 21학번 김채은. 현역으로 들어왔다면 20학번을 달았겠지만 이 대학에 올 거라고 한 번의 재수를 한 끝에 들어온 터라 한 학번이 낮다. 하지만 노력해서 들어온 만큼, 대학에 대한 자부심은 큰 학생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다정함의 인간화 민하준이 나타나기 전까지, 채은이 하준을 본 건 채은이 신문사 건물로 출근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채은은 신문사 주임기자였고, 그렇기에 방송국 건물로 출근 도장을 찍고 밀린 일을 조금 끝내놓고 수업에 들어가는 일이 일상이었다.

이런 채은을 하준이 눈치를 챈 건 교양 수업 때였다. 우연찮게 팀플 활동으로 둘은 같은 조가 되었다.

채은은 하준을 처음으로 가까이 보더니 속으로 엄청 떨려했다. 그렇다 민하준은 완벽한 김채은의 이상형이었다. 그렇기에 만나는 팀플마다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학교 카페에서 하준을 보게 된 채은. 용기 내서 먼저 다가간다.

"안녕하세요, 민하준 오빠, 저 팀플 하는 21학번 김채은이라고 합니다."

"아아, 채은 님? 알죠, 말 편하게 하세요."

한없이 다정한 말투와 눈빛에 채은은 긴장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채은아, 우리 과제 끝나고 같이 밥 한 번 먹을까요? 제가 살게요."

"아니에요.. 사더라도 제가 사야죠 저는 좋아요.."

볼이 발그레해진 채은을 보며 하준은 신기한 아이라고 느꼈다. 머리도 분홍빛에 눈동자도 분홍빛, 볼이 발그레한 것이 딱 물렁한 복숭아 같았다.

하준은 프레젠테이션을 다 만들고 그 카페를 떠났고, 채은은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카페라테만 쭉 빨아 당겼다. 팀플을 하는 동안 채은은 하준에게 몰래 선물 공세를 했다.

초콜릿, 사탕, 과자 등등 하준은 누구인지 눈치를 챘지만 그를 위해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그러는 게 더 재밌었고.

그걸 모르는 채은은 하준에게 대시 실패라는 생각이 들어 발표를 하는 동안에 꼬박 속앓이를 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팀플 과제가 끝나고 먹은 것도 없는데 하루 종일 속앓이를 했던 채은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욱..."

지독한 짝사랑의 속앓이였다. 결국 얼굴이 반쪽이 되어 집으로 향하던 길, "채은아" 하고 누가 불러 세웠다.

하준은 채은을 보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요새 무리했어요? 오늘 밥은 같이 못 먹겠네요.. 푹 쉬세요.."

"아 아니에요, 오빠 가요 저 괜찮아요."

"무리 안 하셔도 되는데.."

모처럼 잡은 약속인데 채은은 그 약속을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짝사랑 상대와 단둘이 밥 먹는 건 잘 오지 않는 기회이기 때문에.

파스타집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채은은 하준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했다.

"아 그리고, 오빠 말고 그냥 오빠라고 불러줘요."

"네?"

"우리 이제 말문도 튼 사람이잖아요."

"네.. 오빠."

밥을 열심히 우물우물 먹는 채은이 귀여운지,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 하준이었다.

"채은아, 어쩌다가 우리 대학 온 거야?"

"으음.. 집안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랄까요?"

채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준은 그 말을 듣고 자신과 비슷함을 깨달았다. 하준의 아버지는 금융회사 대표로 한마디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하준이지만 그만큼 기대감이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고 항상 어깨가 무거웠다.

"그럼.. 지금은 집에서 인정받아?"

"...."

"아.. 이런 거 물으면 안 되나."

"괜찮아요!! 하준 오빠니까 다 말해줄게요."

중학교부터 공부를 잘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안 올라 결국 한 단계 낮은 대학을 썼는데 친척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이야기와 고모와 삼촌이 채은을 학벌로 깔봤다는 이야기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준은 가만히 듣다가 채은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어여쁜 핑크색 눈동자에 또 다른 깊은 감정이 들어있음을.

"힘들었겠다.."

"지금은 대학생활 하면서 많이 좋아졌어요 오빠도 만나고."

"오.. 이거 지금 나 꼬시는 거야?"

"에이.. 저 같은 애한테 안 넘어오실 거면서."

하준은 그런 채은이 너무 귀여웠다.

"... 채은아."

"네?"

"너 나 좋아하지?"

밥을 먹고 커피를 문 채로 가로수길을 걷다가 하준의 물음에 채은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 헉."

"다 티나 바보야."

"으어.."

"그럼, 첫 고백은 채은이가 해줘."

"아아.. 부끄러운데."

채은은 숨겨둔 하트 모양 초콜릿을 하준의 손에 쥐어줬다.

"오빠, 나랑..."

"응."

"아아.. 연애해 줘요."

"왜 이렇게 떨려해."

"그래서 대답은요?"

"내 대답은..."

하준이 채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가 해주는 최고의 대답이었다. 채은은 볼을 발그레 띄었고 하준의 품에 와락 안겼다.

채은은 꿈꿔왔던 엄친아와의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지독한 사랑병은 사라지고 채은에게 하루하루 꽃이 피었다.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고, 동기들은 연애하냐며 물어댔다.

하루는..

"채은아!!"

"어 하준 오빠다, 나 갈게 얘들아."

애들은 놀라 90도로 하준에게 인사했다. 그때부터 채은은 하준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놀랍도록 깊이.

2년 가까운 연애를 할 무렵, 채은에게 시련이 닥쳐온다.

"채은아, 내가 CPA 시험을 준비 중이야, 그래서 채은과 데이트 수가 줄고 채은 많이 못 챙겨줄 것 같아."

"아아 괜찮아요 헤어지잔 말만 하지 마요."

"아 물론 이별 안 하지, 채은 오빠가 소홀해져도 괜찮겠어?"

"네.. 오빠 응원할게요 항상."

하준은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공부했고 그만큼 연애는 소홀해졌다. 점점 예민해지는 하준에 채은은 다가가기 쉽지 않았다.

".... 오빠, "

"어?"

"오빠... 시험이 언제예요?"

"으음... 다음 달 5월 2일?"

꼬박 2년을 하던 하준에게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 하루 절망하는 그를 보며 채은은 그를 열심히 토닥였고 위로했고 응원했다.

하지만 채은도 한계가 있었다. 사람 마음이 점점 식어가면서 하준에게 채은이 없다는 걸, 그 세계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건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회계사 시험 이후에 예준은 후계자 자리를 밟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봉구는 그의 앞길을 막기 싫었다.





" 채은아.."



드디어 결과날, 하준은 그토록 공부하던 CPA시험을 통과했다.



" 오빠 축하해요 진짜"





" 채은아, 우리 연애할 수 있어 이제"





열심히 오빠를 좋아한단 마음으로 기다린 채은이지만,

오빠에게 더 이상 앞길을 막기 싫어졌다. 자신도 취업이 다가올 것을 알던 채은은 울면서 하준에게 말을 꺼냈다.





" 오빠. 제가 오빠 회사에 취업할 때까지.. 기다려줘요

그때도 마음이 아직 남아있으면 우리 그때 만나요..

고마워요.. 오빠"





".... 안돼.. 채은아"





하준은 희미하게 웃고 떠나는 채은을 붙잡을 수 없었다.

무슨 의미로 이별을 결정했는지 알기 때문에.



너무 사랑해서 한 결정이라는 것을





" 미친 듯이 사랑해서, 오빠를 놓아준 거야, "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놓아준 이별도 있다는 것.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이별이 있지만, 기다림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힘듦을 안겨준다는 것.





하준은 그제야 채은의 빈자리가 떠올라,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고, 그건 채은도 마찬가지였다.





"... 내가 너무 사랑했기에.. 미안해 오빠"



채은은 커플링을 빼면서 숨죽여 눈물만 펑펑 흘릴 뿐이었다.




keyword
이전 08화08. 사랑이 늦어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