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고향집을 찾은 어느 날, 부모님이 일하러 가신 사이 혼자 집안일을 해두려 베란다 깊숙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는 엄마가 늘 사용하시던 낡은 세탁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세탁기는 15년은 더 된 구형 통돌이였다. 요즘은 대부분의 집에 세련된 세탁기와 건조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세탁과 건조가 한 번에도 가능한 기기들이 하루가 다르게 출시되지만 엄마는 여전히 그 옛날의 통돌이 세탁기를 고집하고 계셨다.
세탁기 물이 찰랑이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니, 어릴 적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세탁이 끝나면 엄마는 그 무거운 빨래를 손으로 탈탈 털어가며 널곤 하셨다. 갓 나온 빨래에서 나던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그려졌고, 엄마를 돕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키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한 모습들이 다시금 눈앞에 그려지자, 엄마의 정성과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아려왔다.
내가 자라는 동안, 엄마의 세탁기는 변치 않고 같은 자리를 지켰지만 그것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그 낡은 기계는 우리 집안의 일상이었는데, 그 일상 속에 숨은 엄마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던 내가 이제야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것이다.
내가 새 집으로 이사할 때도, 동생이 결혼하고 새 집에 들어갈 때에도, 심지어 자주 보지도 못하는 사촌이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도, 엄마는 어김없이 좋은 거 사라며 봉투를 건네셨다. 그때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지만,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어떤 생각들이 엄마의 세탁기를 보며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본인에게는 작은 사치조차 멀리하며, 그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려고 애쓰셨다.
엄마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신 그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이제 세탁기 바꿀 때도 됐잖아. 내가 하나 사드릴게. 요즘 좋은 거 많아."
엄마는 고개를 가로지으며 미소를 띤 채 말씀하셨다.
"그 정도는 내가 충분히 할 수 있어. 너나 필요한 거 사. 엄마는 이거면 충분해."
엄마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으시다. 그럼에도 본인에게 쓰는 돈은 아끼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려고 하셨다. 엄마의 여전한 고집에 나는 웃음과 한숨이 섞인 채 말했다.
"엄마, 자기한테는 안 쓰고 우리한테만 쓰면 어떡해. 엄마도 좀 좋은 거 써야지."
엄마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셨다.
"그냥 내가 좋아서 그런 거야. 너희가 편해야 엄마도 편해."
엄마의 대답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엄마는 언제나 나보다 더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위해 살아오신 엄마였다. 그래서 엄마는 오래된 통돌이 세탁기조차 여전히 잘 돌아가므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그 장면을 뒤로하며,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아낌없이 주는 엄마. 항상 본인을 위한 것은 늘 뒷전인 사람. 엄마의 깊고 때로는 무겁기까지 한 사랑이 온전히 느껴지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다음번에는 나랑 같이 세탁기 보러 가자! 큰 딸이 하나 선물할게!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엄마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엄마는 장난스럽게 웃으셨고, 나도 그 웃음에 함께했다. 우리 사이의 이런 유쾌한 다툼이 사실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알기에, 그 순간조차 소중했다.
엄마의 고집스러움 뒤에는 언제나 우리를 향한 깊은 배려가 숨어있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이제는 엄마에게도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더 신경 써서 챙겨드리겠노라고.
엄마의 오래된 세탁기는 곧 새로운 세탁기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 세탁기만큼이나 엄마의 웃음이 더욱 환해지기 바란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작은 보답이자, 그 깊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되돌려드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엄마의 사랑은 그 오래된 세탁기처럼 변치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