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아직, 선택하지 못했어

by 가온

'세상이 이렇게까지 좋아졌나' 싶을 때가 문득문득 있다.


내가 주문한 치킨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도 그렇고, 임산부나 환자도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알코올도 칼로리도 설탕도 모두 ‘제로’인 맥주를 발견했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배란일 테스트기’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또 한 번 격세지감을 느꼈다.


사실 ‘발견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세상에 없던 걸 내가 찾아낸 것도 아니고, 임신을 준비 중이던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정보였으니,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표현이 옳다. 아무튼, 그런 제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또다시 생각했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달라졌구나'.


삼십 대 중반의 나이지만, 나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 정말 아는 게 없었다. 그 단어들은 오랫동안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불과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나는 확고한 딩크는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별로 없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대학교 졸업 후, 20대 후반까지 치열하게 취업을 준비했고, 계약직을 전전하다가 30살 즈음에야 정규직이 되었다. 그때 만나던 남자친구가 지금의 남편이 되었지만, 모든 것을 갖춘 상태에서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공무원이셨던 부모님의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결혼을 먼저 한, 그런 케이스였다.(그렇지만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돈은 없었다. 이제부터 모아야 했다. 그렇지만 일단은 우리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직장도 생겼고 결혼도 했으니, 차근히 돈을 모으며 더 나은 '우리'가 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의 30년을 앞만 보고 달려왔으므로,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 임신과 출산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금기어처럼 느껴졌고, 몇 년 동안은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꺼려졌다.




가끔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딩크야?”

그럴 때마다 나는 말했다. “아니, 딩크는 아니야. 그건 또 하나의 결심이 필요한 거잖아. 난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어.”


정말 그랬다. 아이를 갖고 키우는 과정이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와 관련한 어떤 질문을 받거나, 또 주변에서 누구는 임신을 준비한다더라, 누구는 아기를 가졌다더라, 또 누구는 잘 안 됐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새부터 ‘내가 만약…’ 하는 상상을 해 보고는 했다.


어느 햇살 좋은 날에는 ‘그래,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슬 준비를 해볼까?’ 생각하다가도,

또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아직은 아니야. 우리는 준비가 덜 됐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작년 겨울,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지인들이 하나둘씩 임신을 준비한다는 소식, 또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어느새 그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할 거면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이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게 된 것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를 원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지금 너무 편하고 좋은데, 막연한 행복을 위해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것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며칠 고민과 생각을 거듭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이거, 진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맞긴 해?




주변을 보면, 임신과 출산만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거대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

내가 선택을 한다, 마다 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노력한다고 결과가 무조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노력을 덜 한다고 해서 결과가 나쁠 것도 없다.

그러니까 여전히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은, 내 다짐과는 별개인 불확실의 범주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나의 행동은,

'그 시기'에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음에 따른, 나중의 후회를 방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나이에 할 수 있는 이 길을 한 번은 가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다짐을 하면서도 사실 나는 여전히 용기가 없고 자신이 없었다.

해 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역시나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


그러다 내 친구A가 생각났다.

꽤 이른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A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선택이라는 선택지가 없던 상황에서, A는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