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H, 나도 몰랐던 나에 대하여

by 가온

우리는 햇살이 살짝 기울어지는 오후, 어느 한적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스무 살 때부터 친구인 B와 C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카페 안은 적당한 수의 사람들이 내뱉는 낮은 소음으로 가득했다. 커피잔 부딪히는 소리와 나지막한 대화들이 카페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어주는 느낌이었다.


나를 제외한 두 친구는 미혼이다. 그녀들은 아까 밥을 먹으며 미처 다 끝내지 못한 대화를 카페에서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B는 회사 휴가를 부지런히 모아 해외 여행을 계획 중이었고, 우리 중에서 가장 즉흥적인, MBTI 'P' 성향의 C는 B의 여행에 동참 의사를 밝히며 휴대폰을 꺼내 은행 앱을 열고, 본인의 가용 예산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볍게 웃고,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계획을 주고받는 그녀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 한 켠에서는 묘한 부러움이 스며들었다. 싱글인 그녀들은 얽매일 곳이 없는 듯, 자유로워 보였다.


여행 이야기가 잦아들 무렵,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요즘, 임신이 고민이야…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가 이상한 걸까?”


미혼인 친구들 앞에서 꺼내기에는 조금 어색한 주제이긴 했지만, 그냥. 나를 오래 알아준 사람들에게 마음 깊숙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실 어떤 조언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내 안에 맴도는 생각을 꺼내어 놓고 싶었을 뿐인데, 돌아온 반응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A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병원 가서 검사라도 받아봐! 나 AMH 검사받았거든? 난소 나이를 알려주는 검사야. 결과 보고, 당장 결정할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할지 정하면 되잖아.”


이어 B도 덧붙였다.

“응, 나도 받았어. 내 수치는 우리 나이 평균보다 좀 높더라. 뭐, 그럴 것 같긴 했지만.”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이 친구들이 이렇게 준비성 철저한 사람이었나?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지금, 기혼자인 나보다 더 먼저 임신을 대비하고 있었던 친구들의 실행력이 왠지 대단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들은 '내돈내산'으로 검사를 받았으면서도, ‘아마도 기혼자는 정부 지원이 될걸?’이라는, 실용적인 정보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그래, 일단 검사를 받아보자. 결과를 보고 나서
다음 스텝을 생각해 보자. 그래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AMH 검사라... 그 처음 듣는 단어에 대해서,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혼의 친구들로부터 배웠다.






AMH(항뮬러관 호르몬) 검사는 난소의 예비력을 확인할 수 있는 혈액 검사다. 쉽게 말해, 내 안에 남아 있는 성숙한 난자의 양을 알 수 있는 지표라고 한다. 주로 결혼을 준비하거나 임신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받아본다고 했다. 특히, 혹시 모를 난임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권장되는 검사라는 사실을, 나는 그날 이후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친구들이 말해 준 것처럼, 기혼자의 경우 이 검사 비용을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는 것도 알았다. e보건소를 통해 신청하고, 승인 후 연계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다음 영수증을 다시 제출하면 검사비를 지원받는 절차였다.


‘아,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내가 놓치고 있었던 정부의 배려와 준비된 제도들이 이상하게도 그날은 나를 살며시 안아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로 향했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나를 조금 얼어붙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편과 함께 병원에 와 있었고, 몇몇은 임신을 준비하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상담을 받고 있었다. 어쩐지 어색했다.


예약해 둔 덕분에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괜히 심장이 더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뻘쭘한 기분을 애써 억누른 채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의사 선생님과 노련함이 느껴지는 간호사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굴욕의자’라 불리는 진료 의자에서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 선생님께서 채혈을 해주셨다. 나는 여전히 피를 뽑는 것이 두려웠다.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선생님께서 먼저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셨다.


“안 아프게 해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 한마디에 긴장이 조금 풀린 나는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을 건넸다.



“저, 혹시 술을 자주 마시면 수치가 나쁘게 나올까요?”



선생님은 살짝 웃으며 되물으셨다.

“술 좋아하세요?”


나는 부끄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해요. 그래서 혹시 안 좋게 나올까 봐요.”


선생님은 술이 AMH 수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건강을 위해 적당히 마시는 게 좋다고, 소소한 잔소리를 곁들이셨다. 그리고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게 피를 뽑아 주셨다. 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올 예정이라고 했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내는 어느 날,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Web발신]

OOO님, AMH검사 결과 5.75이며, 20대 초 여성 중앙값 이상입니다.



그 문자를 받아 든 내가 느낀 감정은 한 마디로 안도감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나는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남았을지 몰라.


수치가 나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었는데 일단은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치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나에게는 한 줄기의 강열한 가이드처럼 느껴졌다.


나는 곧이어 이 안도감으로부터 온 기쁨을 내 친구 A와 B에게 전하며, 정보를 제공해 준 그녀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

.

.

AMH, 나도 몰랐던 나에 대해 알게 해 준 숫자.

어쩌면 나는 시간을 조금은 더 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시간을 더 알차게, 나답게, 우리답게 활용하리라,

굳게 마음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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