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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Aug 23. 2024

고추, 매운맛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고추꽃이 하는 모든 일이지

고추 농사는 봄과 함께 시작된다. 봄을 기다리던 마음에 성급하게 모종을 심으면 발육도 더디고 자칫 냉해를 입을 수 있다. 중남미가 원산지로 따뜻한 기온에서 수만 년 살아온 온대성 작물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시계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옆 텃밭에서 심기 시작하면 따라 심는다. 매운 것과 안 매운 고추 몇 그루만 심는다.

    

모종을 옮겨 심고 원줄기에서 Y자 형태로 가지가 갈라지면 새 땅에 적응했다는 증거다. 그러면 방아다리에서 나온 첫 고추와 곁순을 제거한다. 첫 고추와 아랫부분 곁순은 초기 성장에 방해가 되고 곁순이 너무 많으면 통풍이 안 돼 병해의 원인이 된단다. 좀 더 성장해 고추가 열리기 시작하면 지주대를 세워 묶어 준다. 이것이 내가 하는 고추 농사의 전부다. 비닐 멀칭으로 풀 뽑을 필요도 없고 가물면 물만 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고추는 칼칼하고 아삭한 맛을 내주며, 작고 앙증맞은 꽃으로 즐겁게 한다.

      

고추는 과피, 태좌, 씨앗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태좌(胎座)는 씨가 붙어 있는 하얀 부분으로 참외에서도 볼 수 있고 동물로 치면 탯줄에 해당한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이 태좌에는 과피보다 몇 배나 많고 씨에는 거의 없다. 태좌는 고추의 끝부분보다 꼭지 부분에 더 많다. 그래서 끝부분을 베어 매운맛을 가늠하고 적당해서 꼭지까지 한입에 먹었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매운맛도 있지만 아삭한 맛도 있다. 아삭대도록 개량한 고추를 오이고추나 아삭이고추라 부른다. 봄에 맨 처음으로 딴 맏물이 가장 아삭거리고 중물, 끝물로 갈수록 과피가 질겨지고 딱딱해져서 아쉽다. 요즘에 육종 기술이 발달하여 끝물까지 아삭한 맛을 유지하는 고추가 있어서 좋다.

    

지금은 잘 먹지 않지만, 어릴 적에 어머니는 가을에 고추를 다 수확한 후에 고춧잎을 땄다. 몇 번 밭에 따라가 딴 기억이 있다. 더위에 따는 고추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다. 요즘에도 재래시장에 가면 할머니들이 고춧잎을 좌판에 소복이 담아 파는 모습을 어쩌다 마주하면 엄마 생각이 난다. 할머니가 덤까지 올려준 고춧잎을 데쳐 된장에 무쳐 먹다가 매운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잎에 남아있는 또 다른 매운맛이다.

    

고추에 꽃이 피었다. 채소는 어디를 주로 먹느냐에 따라 열매채소, 뿌리채소, 잎채소, 줄기채소, 꽃채소 정도로 나눈다. 열매채소는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기에 꽃을 기다리고 때로 인공수정도 해준다. 고추는 열매채소이며, 모종을 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꽃이 피고 제꽃가루받이도 하기에 일부러 수정을 해주지 않아도 되는 순한 작물이다. 작은 텃밭에서야 잘 견디지만 수백 그루씩 재배하는 밭에선 병치레를 많이 하는 약한 작물이기도 하다.

   

고추꽃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아서 지나치기 십상이나 자세히 관찰하면 보는 재미가 있는 꽃이다. 꽃잎은 밑동 부분이 서로 붙어 있는 통꽃이고 바깥으로 갈수록 퍼지다가 가장자리 부분은 갈라진다. 대부분 대여섯 갈래로 갈라지는데 수술 개수와 같다. 많은 식물에서 수술의 개수는 꽃잎의 장수와 같거나 배수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화살나무는 꽃잎과 수술이 4개로 같고, 돌나물은 꽃잎과 수술이 5의 배수이고, 큰개불알풀은 꽃잎 4장에 수술 2개다.  그렇다고 모든 꽃에서 이 규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원예종으로 만든 겹꽃들은 이 규칙에서 많이 벗어난다. <"파브르 식물 이야기" 263쪽 참고

<갈라진 꽃잎과 수술 개수가 각각 5, 6, 7개로 동일>

 색깔도 조화롭다. 꽃잎과 암술대와 수술대는 흰색이다. 이에 비해 암술머리는 노랗고, 수술에서 꽃가루를 담고 있는 주머니는 검은색이고 꽃가루는 노랗다. 얼핏 보면 흰색으로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색이 서로 잘 어울려 아름답다. 각 부위의 색깔을 보아야 고추꽃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꽃이 곤충 눈에 잘 띄고 착륙하여 앉기 좋게 하늘을 향하는 경향이 있는데 고추꽃은 땅을 보며 아래로 향해 핀다. 꽃을 보려면 허리는 낮추고 무릎은 꿇어야 한다. 또한 저녁에도 꽃잎을 오므리지 않고 편 상태로 밤을 새운다. 수정이 되어 어린 고추가 리고 꽃잎은 연갈색으로 변하도록 한동안 고추에 붙어 있다. 이렇게 무릎을 꿇리고 밤을 지새우고 고추를 품어 안으며 고추꽃이 하는 모든 일이 모여 만들어낸 매운맛이었다. 그냥 갖는 맛이 아니다.

     

고추의 붉은색은 매운맛에만 그치지 않았다. 장을 담근 항아리에 고추를 넣거나 붉은 고추와 숯을 새끼줄에 꿰어 둘렀다. 장에 스는 곰팡이나 잡균을 없애고 장맛을 나쁘게 하는 잡귀를 막고자 했다. 아이를 낳으면 줄에 고추와 숯을 꿰어 대문에 걸어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기도 했다. 고추의 붉은색은 귀신을 쫓는 벽사(辟邪)의 의미였고 캡사이신은 균을 잡는 작용이었다. 지금이야 다른 여러 방안이 있으나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렇게 고추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4백 년 남짓 되면서도 우리 밥상과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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