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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Aug 30. 2024

호박꽃, 추억이다

누구나 호박 추억 하나쯤은

호박은 내 기억 속에서 오래되었다. 흙담이나 돌담을 타고 넘으며 길게 자란 덩굴은 담장과 어우러졌고, 초가지붕까지 올라간 호박은 노랗게 익어가며 늙어갔다. 담장과 지붕을 기어오르던 모습은 긴 세월이 흐른 요즘엔 그리운 풍경이 되었다. 며칠 동안 더위를 무릅쓰고 주변 시골 동네를 돌아다니며 운치 있는 호박 넝쿨을 찾아다녔다. 지붕까지 올라간 건 없었고 담장이나 울타리를 덮고 있는 덩굴은 지금도 꽤 볼 수 있었다. 동네를 기웃거리고 호박 덩굴을 뒤적이다 주민에게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덩굴의 원리를 잠깐 설명하면 이내 눈빛이 순해지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호박은 심심한 코흘리개 꼬맹이들의 놀잇감이 되어 주었다. 벌이 꽃에 들어가기를 기다려 꽃잎을 오므려 잡으면 벌의 날갯짓 진동과 잉잉거림이 손에 다급하게 전해졌다. 벌이 든 꽃을 크게 빙글빙글 돌리다 땅에 놓으면 벌은 어지러웠는지 기절했는지 한동안 발버둥 치고 날지 못했다. 호박잎은 때로 모자나 우산이 되어 지루한 등하굣길을 함께 했고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가면도 되었다. 호박은 가끔 나를 시간 저편으로 데라고 간다.


호박은 어디서 자라든 잡초를 밀어내고 제 자리로 만드는 힘이 있다. 심고 특별히 돌보지 않아도 햇빛 잘 들고 퇴비만 충분하면 거침이 없다. 쌀이나 보리만큼 중요한 식량도 아니고 돈이 되는 작물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호박은 보살핌을 받지도 못하고 밭 가운데를 차지해 본 적도 없다. 쓸모없는 자투리땅이나 작물이 잘 크지 않는 자갈밭에서 자랐으며 어쩌다 밭둑 경사면을 차지해도 덩굴이 밭으로 들어오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늘 당당하고 굳세게 줄기를 뻗고 잎을 펼쳤다.


지금은 호박도 전문 재배 농가가 있고 텃밭에서도 한쪽을 차지할 정도로 선호하는 작물이 되었다. 주말 텃밭에서도 간혹 호박을 심는다. 호박은 줄기를 왕성하게 뻗고 잎도 커서 이웃 텃밭에 불편을 주기도 한다. 고라니 출입을 막기 위해 세워둔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기도 하는데 줄기와 호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울타리가 기울어질 정도이니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식물은 광합성에 긴요한 햇빛을 잘 받기 위해 줄기를 세워 경쟁적으로 키를 키운다. 줄기를 세우는 방법으로 속을 탄탄하게 채우기도 하고 반대로 비우기도 하며, 마디를 만들거나, 덩굴을 뻗어 기어오른다. 호박은 덩굴손을 만들어 다른 물체나 식물을 잡고 오른다. 호박이 덩굴손을 뻗어 감는 모습을 보면 신비롭고 흥미롭다.

<방향을 바꿔 가며 감는 모습>

덩굴손이 감기는 원리에 대한 전문가의 글이 있어 정리하여 옮겨 적어 본다. 절반은 시계방향으로 나머지는 시계반대방향으로 감기면서 덩굴손이 팽팽해지는데, 마치 전화 수화기선이 방향을 바꿔가며 꼬이며 팽팽해지는 모습과 같다. 그리고 덩굴손이 물체를 잡으면 목질화가 시작되고 두 층으로 된 세포층의 목질화 정도 차이로 나선을 이루게 되는데, 목질화가 많이 된 층이 덜 된 층보다 더 많이 수축하면서 나선을 이룬다고 한다. <동아사이언스 연재 ‘강석기의 과학카페 95’ 참고>. 과학자들의 연구 덕분에 인터넷 검색만으로 덩굴손이 꼬이는 원리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호박을 보면 꽃이나 열매보다 덩굴손을 먼저 찾아볼 수밖에 없다.


호박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암수딴꽃이며, 이 꽃들이 한그루에서 피는 암수한그루다. 암꽃은 꽃 아래에 작은 호박(씨방)을 갖고 있고 수꽃은 이것이 없어 쉽게 구별된다. 씨방은 수정이 안 되면 더 자라지 않고 시들어 떨어진다. 꽃잎은 1장으로 통꽃이며 끝이 5개로 갈라진다. 꽃잎과 암수술 모두 노란색이다.

<꽃봉오리 밑에 씨방이 있는 암꽃>

호박꽃은 암꽃보다 수꽃이 많다. 암꽃이 많이 피게 하려면 단일저온처리를 한단다. 호박은 낮의 길이가 일정시간(임계일장) 이하가 되어야 꽃이 피거나 촉진되는 단일식물이므, 일조시간을 일정시간 이하(밤 시간을 일정 이상)로 유지되어야 한다. 또한 기온도 일정 온도 이하로 유지되어야 암꽃 착생이 촉진된단다. 텃밭에서야 꽃이 피는 대로, 호박이 열리는 대로 받아들이지만 전문 시설 농가라면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겠다.

<수술과 암술이 확연히 다른 수꽃과 암꽃>

호박꽃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꽃 중에서 아주 큰 편이고 꿀이 많아 여러 종류의 벌이나 개미는 물론 나비도 찾아온다. 꽃 크기에 걸맞게 열매도 상당히 크다. 꽃은 이른 새벽에 피며 정오가까워지시들기 시작해 오후엔 축 처진다. 활짝 핀 꽃을 만나려면 곤충도 나도 서둘러야 한다. 호박꽃은 피어 있는 시간도 짧고 암수딴꽃이라 제꽃가루받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호박은 꽃가루받이를 해줄 곤충을 불러들이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웠다. 우리가 호박꽃을 예뻐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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