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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Sep 12. 2024

부추꽃, 가을을 부른다

여름이 더딘 만큼 꽃도 느리다

유난히 길었던 더위가 한풀 꺾였다. 열린 창문으로 밤새 시원하게 들어오던 바람에도 동틀 무렵엔 찬 기운이 더해진다. 배를 감싸던 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게 된다. 귀뚜라미 같은 풀벌레 소리도 멀리서 들려온다. 날이 밝아오면서 잠들기 전 어둠 속에서 들었던 소리보다 더 맑고 아름답다. 이런 가을바람이 반갑고 더위가 지나기를 바랐어도 여름은 더워야 했다.


심고 서너 달이면 캐낼 정도로 성장이 빠른 감자는 여름이 시작되자 수확했다. 그 자리에 씨앗으로 뿌려졌던 열무와 얼갈이배추는 잎을 더 키울 틈도 없이 벌레들의 먹이터였고 장마와 더위를 견디지 못해 사라졌다. 이제 마른 쭉정이가 다 되었지만 쑥갓, 아욱, 상추는 봄부터 여름 내내 잎을 내주었다. 여름은 어떤 채소에게는 벌레의 삶터였고, 잎채소에는 잎을 내주고 꽃 피고 열매 맺어 화려하게 마무리할 계절이었고, 고구마, 호박, 가지, 고추 같은 작물에는 세력을 키울 기회였다.


부추도 여름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잎줄기를 겨우 땅 위로 내밀 정도로 잘리고 잘려도 포기하지 않고 잎을 키워 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자마자 이른 봄에는 뿌리째 뽑혀 자리를 옮겨 심겼다. 옮겨온 새 땅에 적응하느라 몸살을 앓으며 밤마다 몰려오는 추위를 아무도 몰래 견뎌 냈다. 이렇게 버티고 감당해 낸 덕분에 끊임없이 잎을 키우는 힘이 되었고, 더위가 시작되자 잎과 함께 꽃줄기도 키워 낼 수 있었다.


꽃줄기를 키운 건 순식간이었다. 잎을 베고 일주일 후에 갔더니 10cm 정도 자라 있었고 또 며칠이 지난 후 들렀더니 어느새 잎보다 더 키를 키운 꽃줄기 끝에는 하얀 꽃봉오리가 맺혀있었다. 반가웠다. 부추꽃에 대해 글을 쓰려고 꽃피기를 기다리던 참이었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시기는 꽃 피는 식물이 많지 않아 자연에서 만날 수 있는 꽃이 귀해 무슨 꽃이라도 마주하고 싶었다.


활짝 핀 부추꽃을 보려면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앞서는데 꽃은 더디기만 하다. 내 눈에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똑같고 오늘도 어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마주 하지만 꽃봉오리는 매 순간 변했다. 꽃줄기는 머리에 꽃봉오리를 이고 서서 자연의 시간에 맞춰 제 할 일을 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밭에 가면 기다려온 순간을 놓치기도 한다. 그들과 그 순간을 함께하려면 나는 쉬 떠날 수 없다.


꽃봉오리는 꽃턱잎이라는 얇고 하얀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꽃턱잎은 꽃이 성숙하는 동안 꽃을 보호한다. 꽃턱잎이 열리는 기간은 1주일 이상이 소요되었다. 안에 있는 개개의 꽃이 충분히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일 것이다. 부추와 같은 집안에 속한 작물의 꽃봉오리 모양은 대체로 달걀형인데 크기를 비교하면, 양파가 축구공이라면 대파는 배구공으로 차이가 크지 않으며 쪽파는 야구공, 부추는 탁구공이라 할 수 있겠다.


꽃턱잎이 열리면 우산살 모양으로 퍼진 꽃자루 끝에 또 얇은 막으로 덮인 작은 꽃봉오리가 있다. 이 막은 꽃잎이다. 이 꽃잎도 쉬 열리지 않는다. 또 1주일 정도가 필요했다. 이렇게 두 번 열려야 꽃이 핀다. 지켜보는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은 서두르는 법이 없이 준비가 끝나기를,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부추꽃이 피는 느린 과정>

생각보다 긴 날을 기다리게 하더니 동시에 피지 않고 꽃은 하나둘씩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차례로 피었다. 한꺼번에 피지 않은 건 꽃가루받이를 해줄 곤충을 시간을 두고 넉넉하게 기다리겠다는 전략이다. 꽃잎은 6장으로 갈라지고 끝이 뾰족한 타원형이며, 수술은 6개이며 꽃밥은 노랗고, 암술은 1개이며 초록색 씨방에 둘러싸여 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꽃과 반가운 눈인사를 나눈다. 기다리 보니 꽃과 함께 가을도 왔다.


부추는 생명력이 강해 밭을 나와 야생에서도 자리 잡고 살아간다. 간혹 동네 빈터나 바닷가 기슭에서 만난 부추꽃 같은 꽃이 무엇일까 궁금했다면 십중팔구 부추일 확률이 높다. 산행할 때 바위틈이나 등산로에서 부추를 만나기도 하는데, 부추와 달리 보라색 꽃이 피었다면 그건 산부추다. 산부추를 만나 잎을 떼어 씹으면 갈증도 가시고 산에 오를 힘도 생긴다. 이번 가을에는 보라색 꽃이 활짝 핀 산부추를 만나러 가고 싶다.

<야생 부추><산부추><산부추와 물결부전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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