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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Sep 27. 2024

도라지꽃, 비밀 하나를 보다

다 보여주진 않는다

주말 텃밭으로 가는 큰 길옆에 도라지밭이 있다. 여름 내내 밭에서는 보라색과 흰색 도라지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졌는데도 가까이 다가가서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삼을 키우던 밭으로 가끔 울타리 너머 인삼꽃과 열매가 피고 자라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때 인삼은 궁금했다. 도라지꽃은 어릴 적부터 자주 보아서 이미 안다고 생각했기에 살펴보려 하지 않았다.


고향집 텃밭에서 피던 도라지꽃에 대한 기억은 다른 꽃보다 뚜렷하다. 텃밭에는 부추, 상추, 배추 같은 채소를 재배했는데 채소마다 생각나는 기억이 다르다. 부추는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를 아궁이에서 꺼내 끼얹어 거름으로 주던 생각이 잊히지 않고, 배추는 모종을 옮겨 심고 어린 배추에 밀가루 같은 농약을 뿌리고 애벌레를 잡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고, 고추는 멍석에 아침저녁으로 널고 걷기를 반복하며 햇볕에 투명하게 말라갔으며, 도라지는 꽃이 생생하다.


도라지는 꽃봉오리나 활짝 핀 꽃 모두 오각형이다. 꽃봉오리는 색종이로 잘 접은 오각형 별 같고, 모서리를 따라 그어진 선은 꽃잎보다 색깔이 짙어 뚜렷하다. 꽃봉오리 속에는 공기가 팽팽하게 들어 있어 마치 작은 풍선 같아 서양에서는 도라지를 balloon-flower라 한다.

<풍선과 오각별을 닮은 꽃봉오리>

꽃봉오리를 엄지와 검지로 살포시 누르면 ‘퐁’ 하며 작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터졌다. 터지기 직전 손에 전해지는 팽팽한 긴장감도 재미를 더했다. 마땅한 놀잇감이 없던 시절에 쉽게 그만둘 수 없는 놀이였다. 손으로 눌러 터트려도 아무렇게 찢기지 않고 선을 따라 반듯하게 터졌다. 자연적으로 부풀어 필 때도 꽃잎은 그 선을 따라 펴진다. 그래서 그땐 꽃이 피는 걸 도와주는 놀이로 여겼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올 무렵, 배추 모종을 심기 위해 도라지밭을 지나다 도라지 꽃봉오리를 터트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차를 멈추고 밭둑에 앉아 꽃을 보았다. 가을 문턱이라 대부분 열매가 맺혔고 몇 개 남지 않은 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터트렸다. 터질 때 나는 소리도 손에 전해지는 감촉도 여전하다. 도라지는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꽃잎이 열리는 당황스러운 순간일 테지만 나는 잠시 고향 텃밭으로 돌아간 장난꾸러기가 된다.


꽃을 하나씩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 화면에 비친 수술과 암술의 모양이 꽃마다 다른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럴 때, 더 편하고 정확하게 비교하려면 맨눈보다 사진이 더 낫다. 집으로 와 사진을 확대해 가면서 자세히 대조하니 차이는 확연하다. 새로운 비밀을 보는 순간이다. 하지만 사진으로 관찰하면, 수술과 암술이 변하는 순간은 마주하지 못하고 시간 간격에 따른 변화만 느낄 뿐이다. 꽃 앞에서 지켜보았더라도 변하는 모습을 알아채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꽃은 늘 다 보여주는 법이 없다.


꽃이 핀 직후엔 미성숙한 상태로 수술이 암술을 감싸고 있다. 수술이 먼저 성숙하여 꽃밥이 터지고 꽃가루가 몽실몽실 수술대에 어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시든다. 다음으로, 암술이 성숙하면 암술머리가 벌어지기 시작하고 3~5갈래로 활이 휘듯 활짝 벌어져 휜다. 수술과 암술의 성숙된 모양과 시기가 눈으로 구분될 정도로 분명해서 제꽃가루받이를 확실히 피할 수 있다.

<위: 수술이, 아래: 암술이 성숙하는 과정>

꽃잎은 보라색과 흰색 두 가지이며 보라색 꽃이 훨씬 많다. 수술은 흰색이고, 암술 색은 보라 꽃잎엔 보라색, 흰 꽃에는 흰색으로 꽃잎 색과 같다. 꿀 안내선은 꽃잎보다 진한 색으로 선명하게 멋을 부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밀조밀 정성을 다한 모습에서 아름다움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치열함도 느껴진다. 그래서 벌이 찾아오기를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진다. 일반적으로 수술과 암술이 활짝 열리는 시간이 오전이고 그때 벌의 활동도 활발해서 일부러 오전에 왔는데도 쉬 오지 않는다. 벌이 찾아와야 더 자연스러운 사진도 찍을 수 있는데, 오늘은 꽃도 나도 아쉽다.


추석이 지난 지금 도라지밭의 꽃은 막바지다. 가을이 깊어지면 이 꽃마저 시들고 열매도 여물어 씨앗을 바람에 날리고 나면 겨울이다. 마른 도라지대 위에 눈이 쌓이면 그 밭에 무엇이 자라고 는지, 어떤 기다림이 있는지 기억하이가 나뿐만 아니기를, 내게 고향의 도라지꽃 추억을 되새겨준 밭에 눈 내린 겨울밤의 외로움만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도라지는 초롱꽃과다. 더덕, 잔대, 모시대, 금강초롱꽃, 초롱꽃 등이 같은 초롱과 식물이며 이들 대부분 땅을 향해 꽃이 피는 경향이 있으나 도라지는 옆을 보고 핀다. 도라지처럼 뿌리를 먹는 더덕과 잔대(딱주)는 야산에서 간혹 만날 수 있으나 도라지는 보기 어렵다. 그래도 도라지는 나물로, 기관지에 좋은 약초로 애용되어 농가에서 흔히 재배하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도라지는 우리 땅에서 저절로 나고 자라는 자생 식물이면서 작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친숙하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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