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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Sep 20. 2024

땅콩, 어떻게 땅으로 내려갔나

다 꽃이 한 일이지

땅콩꽃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성한 초록 잎 사이에서 진노랑 꽃이 선명하게 빛났다. 노란 꽃은 햇살을 받으면 하얗게 반짝이곤 하는데, 마침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보 꽃인데도 처음 보는 꽃처럼 그날은 눈길을 끌었다. 이웃 텃밭에서 자라는 땅콩인데도 그날은 밭두둑 두세 개를 순식간에 넘어 다가갈 정도로 이끌렸다. 여름 시작부터 지금껏 피고 졌을 텐데 이제야 보였다. 드러내놓고 화려하게 피는 호박꽃에 마음을 홀린 동안 수줍은 이 작은 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미안함이 느껴졌다.


땅콩꽃은 다른 콩과 집안 꽃처럼 나비 모양으로 기꽃잎, 날개꽃잎, 용골꽃잎으로 구성되어 균형미가 있다. 꽃잎 중 기꽃잎은 깃발을 닮아 붙은 이름처럼 멀리서도 잘 보여 곤충의 시선을 끈다. 진노랑의 꽃잎과 기꽃잎 하단부에서 부챗살로 퍼진 빨간 꿀 안내선이 이루는 두 원색은 조화롭다. 수술은 10개인데 2개는 퇴화하고 보통 8개의 정상적인 꽃밥을 가지고 있다. 암술은 1개로 가늘고 길며 낚싯바늘처럼 휘어진다. 꽃은 새벽에 피어 정오에 오므라들고 날이 흐리면 저녁에 오므린다.

    

콩, 팥, 녹두, 동부, 완두 같은 콩과 집안 식물들은 딴꽃가루받이보다 제꽃가루받이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암술과 수술이 용골판 좁은 공간에 함께 있는 형태도 제꽃가루받이에 용이한 구조일 뿐만 아니라, 자연교배를 통한 유전적 다양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어떻게든 후손을 남기려는 전략적 선택일 것이다. 땅콩의 딴꽃가루받이를 통한 자연교배 비율은 0.2~0.5%로 아주 미미하다.  

* 콩과식물의 나비모양꽃 구조 : https://brunch.co.kr/@vicolor/41


어떤 방법으로든 수정이 이루어지면, 씨방 밑부분에서 씨방자루(자방병, 子房柄)가 땅을 향해 재빨리 길게 자라 땅속으로 들어간다. 씨방은 길어진 씨방자루를 타고 땅으로 들어가 누에고치 모양의 꼬투리와 그 속에 열매로 자라게 된다. 씨방자루의 길이는 보통 16cm 정도이고 20cm까지 자라므로 이보다 높은 곳에서 자란 씨방자루는 땅에 도달하지 못해 시든다. (『식용작물학-전작』314쪽 참조)


러한 씨방자루의 생장 한계 때문에 꽃은 낮은 위치에서 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른 콩과 식물과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고 선택 압력도 작용했음직하다. 일반적인 형태라면 꽃, 씨방, 꽃받침, 꽃자루가 차례로 위치하는데, 땅콩은 꽃자루를 없애고 대신에 씨방에서 꽃받침통이라는 독특한 기관이 위를 향해 가늘고 길게 자라서 그 끝에서 꽃이 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꽃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높여 곤충의 눈에 잘 띄게 하려는 의도라고 여겨진다.

<각각 하늘과 땅을 향해 길게 자란 꽃받침통과 씨방자루>

이런 여러 모색에도 불구하고 전체 꽃의 약 10% 정도만 최종적으로 결실을 본다니 안타깝다. 낮은 결실률을 높이기 위해 씨방자루를 흙으로 덮어주는 북주기를 제때 해야 한다. 또한, 꽃이 6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가을까지 긴 기간 동안 계속 피지만 겨울이 있는 우리나라의 계절 특성상 생육기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른 봄으로 파종시기를 앞당기고 대신 비닐 피복을 하여 보온하면 생육기간을 늘릴 수 있다.

     

이쯤 되면,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굳이 땅 밑에서 꼬투리를 맺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공인된 연구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몇몇 자료에서 본, 땅콩의 고향인 중남미 고산지대의 거친 환경과 동물로부터 씨앗을 보호하려는 의도만으로는 설득력을 얻기에 부족한 감이 있다.   

  

식물의 잎은 모양, 개수, 가장자리 톱니 형태와 갈라진 정도 등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잎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 3백 가지가 넘는다고 하니 잎의 형태만으로도 식물의 다양성을 가늠할 수 있다. 떡잎의 개수에 따른 외떡잎과 쌍떡잎, 넓이에 따른 활엽(수)과 침엽(수)은 우리가 아는 흔한 구분이다. 분류 중 잎자루에 붙는 잎의 개수에 따라, 밤나무와 단풍나무처럼 1장이면 홑잎, 아카시나무와 두릅나무와 같이  이상의 작은 잎이 붙으면 겹잎이다. 겹잎은 여러 개의 작은 잎들이 모여 이루어진 잎으로 이 전체가 한 장의 잎이다. 참 놀랍고 신기하다.


콩과식물의 잎은 대부분 겹잎이다. 겹잎을 이루는 작은 잎이 싸리는 3장, 완두콩은 2~6장, 아카시나무는 많으면 19장에 이르기까지 겹입의 형태도 다양하다. 땅콩은 4장이 좌우로 나란히 붙어 있으며, 자귀나무 잎처럼 낮에는 광합성을 하기 위해 펴졌다가 밤에는 마주난 잎을 포개는 수면운동을 한다. 땅콩잎은 4장이 서로 짝을 이뤄 오므리니 밤에 홀로 외롭게 남는 잎은 없다.

<2쌍의 겹잎이 오전에 펴지고 늦은 오후에 오므리기 시작>

땅콩을 언제부터 부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땅속에서 열매를 맺는 콩과 집안 식물이니 생물학적 기능과 현상을 정확히 관찰하여 반영한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부른 한자 이름 낙화생(落花生)도 꽃이 떨어져 열매를 맺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니 생태를 반영하긴 마찬가지다.


이웃 텃밭에서 땅콩꽃을 본 이후로 텃밭에 가면 건너편 밭이랑에서 자라는 땅콩을 흘끗 넘겨보는 버릇이 생겼다. 9월인데도 잎은 시든 기색 없이 초록으로 생기 넘치고, 꽃도 진노랑빛으로 드문드문 피어있고, 땅에 닿지 못한 씨방자루는 땅을 향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고, 땅 속에는 누에모양 꼬투리 안에 여물어야 할 열매가 있다. 땅콩은 여전히 할 일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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