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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 Sep 20. 2024

허리케인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들

피해를 복구하는데는 돈이 든다 


“엄마, 집에 불이 안 들어와” 아들의 목소리에 눈꺼풀이 열렸다. 
침대에 누운 채 아들이 뱉은 단어 하나하나를 조합하고서야 ‘정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한차례 깼다가 다시 잠든 참이었다. 천천히 이불에서 빠져나와 여기저기 불을 켜봤다. 마치 집이 정전되더라도 어느 하나는 불이 켜질 거라는 듯이. 이때만 해도 ‘곧 들어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전보다 비가 더 걱정이었다. 빗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사오기 전 집은 이 정도 비면 순식간에 집 앞 도로가 물에 잠겼다. 도로가 다 채워지면 인도로, 그 뒤엔 앞마당 잔디까지. 수영장 물이 넘쳤던 날에는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 앞까지 물이 찬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사는 동안 비가 오면 늘 물이 넘칠까 걱정이었다.
창밖을 보니 새로 이사한 동네는 배수가 빨랐다. 비 내리는 속도와 구멍으로 들어가는 속도가 같았다. 


하지만 전에 집은 장시간 정전 된 일은 없었다. 그래서 전기가 끊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핸드폰에서는 허리케인 경보가 심상치 않게 울려댔지만 다른 집도 이런 지, 왜 이런 건지, 언제 들어오는지 돌아가는 상황을 알 길이 없었다. 와이파이 신호가 꺼지면서 핸드폰도, 노트북도, 티비는 먹통이 됐으니까. 





전기가 끊어진 지 10시간이 지나자 허리케인 경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어느새 비는 그쳤고, 해는 강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전기는 대체 언제 들어오는 걸까?' 쉽게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마음과 설마 하는 생각이 묘하게 교차되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도 궁금하고, 한국에 출장 중인 남편에게 연락도 남길 겸 집을 나섰다. 신호등은 모두 멈춰 있었다. 곳곳에 쓰러진 나무도 보였고, 웅덩이가 만들어진 곳도 있었다. 일 년 내내 닫는 일
 없는 맥도날드도, 주유소도 닫혔다. 세상이 멈춘 느낌이었다.



유일하게 마트와 집 관련 용품을 파는 가게만 열려있었다. 생존과 연결된 상점만은 따로 전기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주차를 하고 마트에 들어갔다. 얼음 사려는 줄이 길다. 물과 빵 개수 제한이 있었다. 암담했다. 이럴 때 남편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몇 있지도 않은 한국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에 가있었고, 아이들 스포츠 팀에서 알게 된 외국 엄마들은 상황이 나와 다르지 않았다. 문득 외로움이 몰려왔다. 조금 겁나고, 조금 서글퍼졌다.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남편에게 문자부터 남겼다. 한국은 밤이라 답은 오지 않았다.
마트 구석에 서서 가만 생각했다. ‘우리 정전됐어. 우리 좀 재워줘’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친구가 몇이나 있을까 하고. 딱 둘이 떠올랐다. S는 한국에서 돌아오기 전이었기에 나머지 한 친구인 H에게 전화했다. 그 친구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언니네 집에 발전기 있잖아" 

우리 집에.. 발전기가 있단다. 마당에 있던 그 커다란 기계가 발전기였던 말인가? 그럼 전기가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따로 켜는 방법이 있나? 



집에 가서 발전기로 추정되는 기계를 보니 빨간 불이다. 옆집도 같은 기계가 보이는데, 거긴 초록불이 반짝이고 있다. 정전된 이후 줄곧 옆집의 발전기는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집은 왜 안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나 의심되는 건 '가스'였다. 

이사 올 때, 가스를 따로 신청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갑자기 가스가 끊어졌고, 가스 회사에 요청해 연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외부 가스 연결이 되지 않아 사람을 불러둔 상태였다. 아무래도 가스를 연결해야 발전기도 돌아갈 것 같았다. 

예약 날짜는 며칠 남았지만 마음이 급했다. 다시 마트에 달려가 플러머에게 전화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사진 한 장을 보내온다. 앞마당에 있던 나무가 쓰러지며 차 두대를 덮친 사진을. 




허리케인에는 베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허리케인 피해는 휴스턴과 근교 전역에서 일어났으며, 정전된 집은 200만 가구에 달했다. 


플러머 아저씨는 집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 저녁 무렵 와주었다. 처음 플러머를 예약할 때만 해도 외부 가스 연결이 이슈였다. 하지만 아저씨가 와서 가스를 켜보니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발전기만 연결해 주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다. 원래는 정전되면 발전기가 자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맞단다. 덮인 뚜껑 안에 컨트롤러가 있다고 했다. 그걸 열어야 했지만 전 주인에게 받은 열쇠 꾸러미에 맞는 게 없었다. 중개인을 통해 전주인과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그는 열쇠의 행방도, 방법도 몰랐다. 결국 아저씨는 주변 발전기 수리 업체 연락처만 나에게 찾아서 주고 떠났다. 

다시 밤이 되었다. 





35도가 넘는 날씨였다.
만 2일이 되자 집 내부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더워서 밥을 해 먹기 쉽지 않았다. 냉동실 얼음이 녹으며 냉장고 앞에 물 천지가 됐다. 가라지에 있던 서브 냉장고는 안에까지 따뜻해졌다. 마트는 얼음 공급을 멈췄다. 속수무책이었다. 어딘가 연락을 해야 할 때마다 여전히 마트로 달려가야 했다(마트 안에 들어가야만 연결되었다). 전기가 없으니 어둠은 일찍도 찾아왔다. 밝을 때 애들을 양치시켰다. 그러다 어두워지면 아이들과 차로 들어가 에어컨을 틀고 책을 읽었다. 휴대폰을 충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대체 언제 복구되는 걸까?'

그걸 알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웠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발전기 회사와 통화했다. 누군가 와달라고. 하지만 그가 알아낸 건 '열쇠공'을 불러야 한다는 사실과, 리셋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잠겨있으면 열쇠공을 부르는 게 상식인데 그게 생각이 나지 않은 거다. 


열쇠공이 뚜껑을 열어주었다. 특별한 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느다란 철 꼬챙이 비슷한 걸로 쑤셔 넣으니 탕 하고 열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과연 듣던 대로 버튼들이 보인다. 남편에게 들은 대로 버튼을 누르니 초록 불이 들어오며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집 곳곳에 전등이 켜져 있었다. 에어컨도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밥도, 빨래도 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도 나왔다. 와이파이도 연결됐다. 그리고 냉장고! 냉장고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간 당연한 듯 있어주던, 그래서 당연했던 전기가 사실은 사방에 있었다. 




우리 집은 전기가 나갔을
뿐이다. 

고작 3일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냉장고 말고는 피해도 없었다. 


하지만 전기가 끊어진 지 140시간이 지났을 때까지 복구되지 않은 집은 46만 가구에 달했다.
모든 집이 복구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들 배드민턴장 근처 집은 마당에 있는 거대한 나무가 집을 덮쳤다. 배드민턴장 화장실은 지붕이 날아갔으며, 옆집은 야자수가 쓰러졌다. 길거리에 부러진 나무가 많이 보였다. 펜스 쓰러진 집도 많았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자리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으며, 그 피해를 복구하려면 돈이 든다. 





예상치 못한 비용
- 플러머 : 73.44불(10만 원) - taskrabbit 이용해서 저렴합니다 

- 열쇠공 : 285불(38만 원)
* 가스가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던 돈이다!!! 

허리케인에 대비하기 위해 발전기 설치를 한다면
여기는 전선이 매립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있다. 강한 바람에 전봇대는 쓰러지기 마련이고, 따라서 
이런 일이 반복된다. 대비를 하려면 발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또한 돈이다. 

친구가 그랬다. 설치하려고 알아봤는데 15,000불(2천만 원)이더라고. 

그나마 예약이 너무 많아서 내년이나 설치가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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