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편의 첫 스타트업
한 달 전이다.
"다음 주 수요일에 투자자 둘이 집으로 올 거야." 남편이 말했다.
응?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나는 수요일에는 바빠서 늦게 들어오는데. 그럼 밥은 어떻게 차려야 하지?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좀 그렇지 않나?
내 눈빛을 읽었는지 남편이 차례대로 답한다.
"목요일 새벽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수요일에 오는 거야. 밥은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알아서 장도 보고, 준비하고, 요리도 할 거야. 자기는 애들이랑 일 보고 편하게 들어와."
다행이다. 그냥 적당히 안주 사고, 적당히 알코올을 준비하고, 적당히 고기 좀 구우려나보다. 하지만 다음에 그가 하는 말에서 나는 부담을 느껴버렸다.
"우리 회사에 젤 많이 투자한 회사의 투자자 두 명인데(아, 초기에 투자했다던 그 회사구나), 한 분은 매년 200억을 받아(뭐라고?). 그렇게 몇 년을 받고 있대."
그럼 매달 16억씩 받는다는 건가? 세금으로 반을 떼가도 8억인데. 하루에 그럼 얼마야?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매일 최소 2,600만 원 넘는 돈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그것도 몇 년을!
(투자한 회사가 몇 십배의 수익을 내면, 투자자는 이렇게나 큰돈을 받는다. 대신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는 투자한 돈은 사라진다.)
9시가 가까워서야 들어온 집 식탁에는 거하게 취한 세 남자가 앉아있었다. 인사를 하고, 막내를 재운 후, 나도 식탁 한 자리에 합류했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매년 200억을 받는 투자자는 적당히 마른 체형에 소탈한 인상이었다. 목소리도, 말투도, 표정도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유쾌했고, 자리를 리드하는 편이었다. 남편과는 오랜 친분으로 형 동생 같은 분위기였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다른 투자자는 조용한 편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분이었다. "어떻게 투자자가 됐어요? 그럼, 그전에는 어떤 일을 했어요? 처음에 투자회사로 간다고 했을 때 와이프분의 반응은 어땠어요?"라는 나의 질문에 "원래는 N사에서 일을 하다가, 다른 직종으로 바꿔보고 싶었어요. 그때는 투자 회사라는 개념도 별로 없던 때였는데, 아는 분 이야기를 듣고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두 군데 투자회사를 거쳐서 지금 회사로 옮겼어요. 장모님이랑 장인어른께는 처음에는 말하지 못했어요." 등의 답을 들려주었다.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참 재밌다)
대화가 무르익었을 때, 나이가 더 많은 투자자가 남편에게 물었다.
"너 예전에 승원이랑 같이 회사 했었지?"
"첫 스타트업이 그 친구랑 한 거였죠." 남편이 답했다.
"근데 어떻게 갈라서게 된 거야?" 투자자가 다시 물었다.
첫 스타트업.
도현은 나와 만나기 전부터 친구 승원과 스타트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D-day는 도현과 나의 결혼식 한 달 후였다. 실크로드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남편 직장 동료들을 불러 집들이를 했다. 그 후 그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도현과 친구 승원은 홍대의 한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차렸다. 신혼집이 고양시 행신동이었으니 도현의 출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사정이 달랐다. 결혼 직후 이직한 '엔씨소프트'는 당시 삼성역에 있었다. 매일 새벽 6시 50분에 집에서 나와야 9시까지 출근할 수 있었다. 앉아가는 일도 희박했다. 퇴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눈 뜨면 출근을 했고, 퇴근하고 집에 가면 잘 준비를 했다. 매일 녹초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되어가는지, 어려운 점은 없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믿어주면 되는 줄 알았다. 내가 꼬치꼬치 질문받는 걸 싫어하기에,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느닷없이 회사를 나왔을 때도, 잘 몰랐다.
그래서 그가 공식적인 백수가 된 후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너무나 해맑게 도현의 스타트업 파트너였던 승원 씨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와인 이야기가 나와서, 내가 아는 사람 중 와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승원 씨라서, 도현이 어떤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는지 전혀 몰랐기에, 그래서 "승원 씨한테 (지금 당장) 전화해서 (와인에 대해) 물어보지?"라고 말했다.
그때, 도현이 불같이 화냈다. 눈동자에는 분노 비슷한 게 서려있었다. 그가 그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짐작만 했다. 좋게 헤어진 게 아니구나. 상처가 생겼구나. 그 뒤로 다시는 묻지 못했다.
그 뒤로 16년이 지났다.
그의 첫 스타트업이 실패로 끝난 지도, 쏟아지는 질문을 속으로 삼킨 지도.
"근데 어떻게 갈라서게 된 거야?" 투자자가 툭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도현을 바라봤다.
궁금했다.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데?
(다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