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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백 Aug 11. 2023

내 잼버리를 망치지 말아 주라...

 이렇게 오랜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열 살 언저리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연히 공부했던 기억은 없고 특별하게 놀았던 기억만 나는데 나에게 정말 좋았던 기억 중의 하나가 바로,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해 활동을 했던 일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보이스카우트에 들었다. 3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꼬박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했는데 웬만한 행사에는 다 참여를 했다. 행사 때마다 배지를 하나씩 받을 수 있는데, 그 배지를 모으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60개 가까이 되는 배지를 모았던 것 같다. 뒤뜰 야영, 하이킹, 캠핑 등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정통신문을 들이밀며 엄마에게 사인을 하라고 부추겼다.


 엄마는 내가 집을 떠날 때면 집 밖에서 자고 올 어린 아들에게 꼭 흰색 타이즈를 신겨주었다. 보이스카우트 하복은 반바지였는데, 밖에 나가서 까지거나 다칠까 봐 그랬던 것이다. 엄마한테 싫다는 소리는 못 하겠고, 친구들 사이에서 가오는 살려야겠고. 집을 나선 후에 몰래 흰 타이즈를 벗어서 가방에 넣고 맨다리를 내놓고 다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다 함께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직접 텐트를 치고 밥을 지어먹었다. 보이스카우트 집단의 한 조는 대개 6학년 보장과, 5학년 부보장으로 이루어졌다. 1조에 보통 12명씩 배치되었는데 군대의 분대와 분대장 같은 개념이다. 보장은 주황색 마후라를 하고 있었는데, 이 마후라 색깔이 굉장히 위협적인 권위처럼 느껴졌다.


 학교 뒤뜰 야영을 할 때였다. 야영을 하는 밤에는 대원 전원이 중간에 눈 비비고 일어나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집에서는 엄마가 목 터지게 불러도 밤잠에서 깰 줄 몰랐던 녀석들이, 불침번 교대 시간이 되면 눈을 번쩍번쩍 뜨며 제 역할을 했던 것도 신기하다. 밤에는 사이트 밖으로 나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나는 자다 말고 화장실이 가고 싶어 슬그머니 텐트 밖으로 나갔다. 몰래 소변을 보고 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 주황색 마후라를 매고 있던 보장 형을 딱 마주친 것이다.

 “어이, 거기 뭐야.”

 ㄱ자 후레쉬로 나를 한 번 비춘 보장 형은 어디서 구했는지 손도끼 하나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그 위압감에 기겁을 한 나는 다시 텐트로 기어들어가 오줌을 꾹 참고 잠들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역하면 도끼로 까일 것 같았다.    

 

 외부 야영을 나간 날이었다. 건너편에 고등학교 스카우트 형들이 야영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우리 구역 밖으로 가면 안 되는데 친구와 장난치다가 고등학생들 진영까지 가게 되었다. 하필 어슬렁거리고 있던 형들에게 딱 걸려 운이 없게도 얼차려를 받게 된 것이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나와 친구는 기합이 바짝 들어 꼼짝도 못 하고 키가 어른만큼 컸던 제복 입은 고등학생 형들 말을 그대로 따랐다. 고작 고등학생 밖에 되지 않았던 녀석들이 꽤 위엄 있는 척을 했는데 초등학생들에겐 상당히 무서웠던 것이다.

 실컷 우리를 놀린 형들은,

 “야 저기 먹을 것 좀 가져와 봐라”

 하더니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잔뜩.

 그때까지 잔뜩 찡그려 있었던 우리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나와 친구는 양팔 가득 과자봉지를 끼고 ‘아싸’ 소리 지르며 사이트로 뛰어들어왔다. 과자가 굉장히 귀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를 본 친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 가서 받아 왔어?”

 “어, 저기 고등학생 형들 있는 사이트 근처에 지나갔는데, 얼차려 몇 번 시키더니 과자 주던데?”

 “뭐뭐 시키냐?”

 “엎드려뻗쳐도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몇 번 하고. 말 잘 들으면 줘.” 

 친구들 몇은 그리로 가서 형들이 자신들에게도 눈길을 줄까 봐 한참을 알짱거려 보았다. 

    

 식사는 당연히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식사 시간만 되면 우리는 실랑이를 벌였다. 각자 집에서 밥 하는 걸 배워서 오는데 엄마들마다 하는 방법이 다 달라서 매번 다퉜던 것이다.

 “아냐, 불을 더 세게 하는 거야.”

 “아냐,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하는 거 아니랬어.”

 “너네 엄마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사이트마다 아우성들이 나왔다. 식사 준비가 다 되고 나면 대장 선생님이 직접 맛을 보며 

 “야, 4조 너네 여기 맛이 왜 이래.”

 “음, 2조는 잘했네.”

 하며 평가를 해 주었다. 식사 준비가 끝나면 식판의 오열을 맞춰서 각을 잡고 밥을 먹었다. 식사 예절을 배우고, 규칙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 마냥 재밌었다. 군대와 비슷해도 군대 때는 비뚤어진 게 있으면 얻어맞지만 이 때는 그럴 일이 없었으므로 마냥 즐거웠던 것 같다.     

 

-식사 준비 다됐다 다 같이 먹자~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 랄라랄라랄 밥, 국, 김치!-  


 식사 전에 다 함께 입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식사를 했다. 풀떼기만 먹어도 꿀맛이었던 때다. 보이스카우트는 생존이다. 우리는 부모님 손을 떠나 몇 박을 외부에서 머물며 생존에 관한 모든 것을 보이스카우트를 통해 배웠다.     


 어느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운동장에 집결해서 각 조마다 부보장이 조깃발을 들고 사열을 한 뒤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조별로 깃발을 앞세워 오전 10시경 출발하면 수킬로미터를 걸으며 반나절을 하이킹을 했다. 길도 멀고 날도 더웠지만 하이킹 중간에는 항상 이벤트가 있었다.

 “환자 발생, 환자 발생.”

 메가폰의 사이렌 경보 소리가 울리면 우리는 신속하게 한 팀이 되어 조치를 취해야 했다. 환자의 혁대를 풀고 차가운 물로 찜질을 하고 머리를 낮게 해 주고. 배운 대로 잘 처치를 해주면 무사통과였다.

 뿌듯한 마음으로 길을 다시 재촉하다 걷는 것이 지겨울 즈음이 되면 또 한 번

 “골절환자 발생. 골절환자 발생.”

 하고 사이렌이 울렸다. 그러면 고사리 손 여러 개가 다시 한번 힘을 모아 부목을 대고 옮기며 배웠던 것을 실전에서 써먹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 스카우트 대장님은 육군 장교 출신이었다. 4학년 나의 담임이었고 내가 졸업할 때까지 스카우트 대장을 맡았다. 장교 출신이었던 선생님의 포스는 현역 군인들 못지않게 멋졌다. 선생님들은 학교에선 꽤 무서웠지만 야영을 나올 땐 우리가 심하게 장난을 쳐도, 큰 소리로 떠들어도 크게 혼내는 일이 없었고, 그래서 야외에서 선생님에게 혼나서 기분 상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야, 선생님들 좀 착해지지 않았냐?”

 우리는 교실에서와 온도가 한층 달라진 선생님들을 보고 감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도 어렸던 우리가 생존을 해 보겠다고 규칙을 지켜가며 보이스카우트 대원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흐뭇했을 것 같다.


 6학년에 되고 나서는 새로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스카우트에서 야영하는 날은 선생님들도 모여서 술 마시며 즐겁게 노는 날이라는 것을. 3학년 때부터 무수한 야영을 따라다닌 나는 6학년이 되자 자연스럽게 보장이 되었고, 우리 대장 선생님은 꼭 나에게 심부름시켰는데, 슈퍼에 가서 소주와 담배를 사 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어른들 술, 담배 심부름을 많이 하던 때였다. 혼자 가면 위험하니까 세 명씩 함께 가라고 해서 나를 포함한 단짝 친구들 셋은 종종 술담배 심부름을 다녔다. 우리는 심부름이 좋았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은 임무를 마치고 온 우리에게 1000원 씩 쥐어주었던 것이다. 거금이었다. 50원짜리 뽑기를 20판이나 할 수 있는 판돈이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애들 손에 만 원 씩 쥐어준 것보다 큰 것이었다. 우리는 야영 때마다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뭐 시킬 일이 없나 하고 선생님 근처를 어슬렁 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 내가 6학년이 되던 그 해 강원도 고성에서 프리 잼버리 대회가 개최되었다. 본 잼버리는 91년이었는데 그전 해에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하기 위해 한국 잼버리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배지를 하나라도 더 모아야 했기에, 잼버리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나는 일단 참가신청서를 내고 봤다.

 본 잼버리는 수 만 명이 참가했던 것으로 아는데, 프리 잼버리도 8개국에서 수천 명이나 모인 큰 행사였다.   


 캠핑을 하도 많이 다녀서 다른 기억들은 드문드문 나지만 난생처음 노란 머리 친구들을 만났던 프리 잼버리는 잊을 수가 없다. 당시는 지금처럼 세계가 하나일 때가 아니었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집은 거의 없었으며, 세계는 고사하고, 내가 살던 경기도 안양을 벗어난 다른 지역 친구들을 만나기도 힘들던 때였다. 우리는 처음 본 생김이 다르게 생긴 외국인에게 가까이 갈 용기도 내지 못하고 멀리서 그들의 눈코입을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못 알아들을 외국어를 듣고 까르르 거리며 이방인을 신기해했다.


 세계 잼버리 대회도 다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묵을 야영장을 짓고 밥을 해야 했다. 진지 구축이 시작되었다. 나는 3학년 때부터 무려 4년 동안 쌓아온 풍부한 경험으로 보원들을 진두지휘하며 배수로 파고. 사이트를 만들었다.

 평가단이 와서 

 ‘너네 이거 누구 생각이야?’

 하며 칭찬도 해주고 평가를 하고 갔다. 우리는 외국 친구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누구 하나 게으름 피우는 사람 없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후에 외국 팀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론은 그들이 더욱 창의적이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온 대원들은 날씨와 일어나지 않을 변수를 다 고려해서 사이트를 물색했다는 후문이었다. 그들은 비 오는 걸 대비해서 딱딱한 땅을 찾았고, 우리는 땅파기 쉽게 말랑한 땅을 찾았던 것 같다. 


 당연히 반에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소통을 했다. 한 외국 친구가 다가와서 양동이 세 개를 빌리러 왔다. 손짓 발짓을 보아하니 몇 번 쓰고 돌려준다고 하는 것 같았다.

 “야, 저거 빌려달라는 거 아니냐?” 

 “몇 번 쓰고 가져다준다는데?” 

 우리는 외국 친구가 찾아오면 전원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우르르 몰려와 이 외국인이 뭐라 말하는지 귀를 쫑긋거리며 집중해서 들었다.


 우리도 외국 팀들에게 빌리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차마 용기 내서 외국 친구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가위바위보로 누가 가서 빌려올 건지 소심하게 정했다. 말 붙여보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데, 쑥스럽고 이상해서 제대로 말도 걸어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행사였다.     



 스카우트의 모토인 준비라는 구령에 따라 우리는 항상 생존의 준비를 했고 형들과 동생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웠고 자급자족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놀러 갔던 적도 많았지만, 부모님이 다 해주던 여행지보다 모든 것을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 가던 보이스카우트 활동이 훨씬 기억에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즈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보이스카우트의 활동이 우리 때만큼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린 소년이었던 참가자의 입장으로만 생각하자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때 잼버리 대회로 고성에 왔던 외국 친구들도 아마 나처럼 중년이 되어 있겠지. 나와 함께 활동한 대원들도, 지금쯤 아버지가 되어 자식들의 보이스카우트 행사를 보며 나처럼 옛날을 떠올리고 있을까.

 이번 잼버리 사태와 어른들의 욕심으로 인해 이 아름답고 소중한 아이들의 추억이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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