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시와 편견
시 쓰기에 뭔가 특별한 것은 없다. 걷기가 걷는 행위인 것처럼, 시 쓰기도 글자 그대로 시를 창작하는 행위다. 그런데 이 말에는 무의식중에 달라붙는 단어가 있다. 바로 ‘단련’과 (존재한다고) ‘가정된 시인’라는 단어다. 전자와 관련해서 독자들은 작품 하나에도 발레리나의 섬세하지만 뒤틀리고 거칠고 두꺼운 발과 같은, 시인들이 매진하고 몰입했던 경험의 막중한 무게가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독자들은 상상을 통해 ‘시인’을 가정하고서 그에게 예술가적 기질과 기발함, 여기에 수반되는 천재적 악취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목공과 시 쓰기는 양자가 모두 어느 정도는 ‘장인’(匠人)으로서 고양되기까지의 습작 과정을 필요로 하지만 목공은 손가락을 운지하는 피아노 교본을 마스터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반면, 시 쓰기는 그것을 확정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시 쓰기는 자신의 감정, 생각, 느낌, 기분을 모국어로 표현할 줄 알면 충분하다. 요컨대, 목공은 따로, 누군가로부터 그 방법을 전수받아야 하는데, 이에 비해 모국어는 생래적이다.
이 모국어를 새로 발견하려는 시인들의 노력은, 당연하지만 ‘전달’과 ‘창조’라는 언어의 두 가지 쓸모와 역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로 이어지게 된다. 대목장이 곧게 자란 전나무에 집중하고, 조각가가 대리석 앞에 서서 그 속에서 발화(發話)되는 특정한 형상을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국어는 생활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이고 광범위하며 절대적인 실존-체다. 시인은 이 모국어를 그의 감각과 사유가 허락하는 한 최대치로 고양하려 노력한다.
시인들은 항상 고민하고, 절망하며 성찰한다. 그들은 모국어를 다루면서 수많은 실험을 한다. 같은 뜻을 내포한 문장이라도 그 숨과 결을 다르게 배치한다. 조사 하나를 바꾸면서 문장 전체를 새로 쓰기도 한다. 가끔 커뮤니티에서 작품을 공개하거나 낭송한다. 자신의 작품이 모국어를 조금 더 고양시킬 것이라 굳게 믿으며 작품의 마침표를 찍는다. 때문에 시인이 쓴 문장들은, 그것에 이르기까지의 그들이 고민하고 절망하며 성찰했던 모든 과정들이 깊게 각인되어 있다. 철저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자신의 세계를 파고들었던, 그 혹독한 시간들 말이다.
이것이 시인들의 머릿속과 손가락에 각인된 시 쓰기 프로세스다. 뭔가 신비하고 극적이며 우리가 도저히 접근하지 못할 무언가는 전혀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기울어져 있고, 몰입하고 있으며, 죽음에 이르러 화장한다면 말의 사리들이 쏟아져나올 것 같을 뿐이다. 시인은 모국어를, 그 세속화된 일상에서 고양시키는 자다. 일상어를 ‘일상어-속-에서’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자다. 시인은 언어의 사제가 아니다. 그는 ‘시’라는 사원을 향해 열린 문이 닫히지 않도록 지키는 자이며, 그러한 과정을 자기-단련을 통해 극복하고 있는 자다.
이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다. 놀이에 집중하는 혹은 플라스틱 모형의 조립에 온 정신을 빼앗긴 아이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시를 천재적 예술가들의 전유물로 여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언어에 대한 특출난 감각과 사유를 가진 자만이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완벽한 편견이다. 인간의 역사에는 천재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들의 예측 불가한 작업으로 ‘시’에 대한 인식이 180도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어 왔다. 하지만 시는 누구나 써왔고, 그들의 작품은 후대로 이어졌으며, 미래의 우리는 그 찬란한 언어의 내륙을 보는 것이다.
문제는 시를 예술가의 전유물로 간주하는 순간 시를 쓸 수 없게 된다는 것. 시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를테면, 시계공의 고도로 특화되고 정밀한 작업의 결과물로 돌변한다. 시는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감상하고 창작할 수 있는 생활의 한 영역이다. 다시 말해, SNS 등에 자연스럽게 ‘나’를 표현하는 이미지나 영상을 올리는 것과 시는 다르지 않다. 예컨대, 노벨상을 수상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도 자신의 생활을 가감없이 표현한다.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선택의 가능성」 부분51)
이처럼 우리는 도처에 산재하는 온갖 사물을 만난다. 그것을 지켜볼 때도 있고 다가가서 만질 때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지금 내 눈앞에까지 왔으며, 색과 촉감, 무게는 그 사용에 얼마나 적합한지를 따지기도 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관찰한다.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들여다보기도 한다. 갑자기 사물이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는 것에 놀라기도 한다. 사물의 빨강이, 햇볕을 오래도록 머금은 종이 같다는 생각이 들 때고 있다. 시는 바로 이 생활 영역에 집중된다. 우리가 늘상 보는 사물에서 시작하며, 그것의 원근과 질감에 대한 인상을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시는 이 생활-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편견을 버리자. 시는 천재적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바로 생활 속에서 내가 나를 표현하는 한 방식이다.
5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최성은 옮김,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3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