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3] 경험과 좋은 시는 비례한다

제5장 시와 편견

by 박성현

우리가 못에 대한 시를 쓸 때, 그 ‘못’의 구체적인 쓸모와 모양, 무게와 질감을 모른다면 그 시는 산으로 가게 될 확률이 상당히 높다. 시인이 구상한 설계도부터 잘못되었다면, 나중에 작품이 완성되더라도 독자는 이해조차 하기 어렵다. 만일 ‘경험’이 사물에 대한 사실을 알기 위한 혹은 사건의 흐름과 전개, 관련 인물들의 성격이나 역할을 알기 위한 것이라면, 경험과 좋은 시는 비례한다는 말은 곧바로 정당성을 확보한다. 일례로, 필자가 참여했던 모 기관의 창작기금 선정 심사에서 ‘등산’과 관련된 시집이 심사 대상으로 올라온 적이 있다. 나를 비롯한 다른 심사위원들도 그 소재의 참신함과 독특한 형상화를 장점으로 꼽았으나, 결국 최종후보에서 제외시켰다. 손에 잡힐 듯한 구체성이 결여되었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모호했으며, 이를 종합하면 일종의 ‘장식’에 그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경험이 시인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은 숨 막힐 듯한 디테일과 여기에 뒤따르는 사실적인 묘사다. 그는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며, 후자에 해당되는 것은 손으로 만져보거나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습득한다. 신동엽의 「금강」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창작된 서사시도 이와 같은 과정을 반드시 거쳤다. 시를 쓸 때는 모르는 것은 쓰면 안 된다.

하지만, 경험이 창작을 위한 순례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숙고하라는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 쓰기는 경험을 소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시인의 경험에 내재한 사물의 경이로움을 사원을 건축하듯 형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이 많아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시에서는 무엇을 경험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형상하느냐’가 관건이다.

리오타르는 모든 파롤(발화된 말)에는 ‘담론-공간’과 ‘형상-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전자는 일상어를 중심으로 하여 통용되는 사회적(혹은 공적인)이고 개인적인 말의 세계로써 의미의 투명성이 강조되는 반면, 후자는 시인이 시를 통해 그려내는 상상의 세계로 자기 폐쇄적일 수도 있는 언어의 내적 논리가 강조된다. 요컨대, 전자에서는 언어보다 세계가 더 우선시되고, 후자에서는 세계보다 언어가 더 부각된다. 시는 언론이나 정치 영역과 같은 담론의 산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시는 언어의 회로를 다듬어서 정교하고 섬세한 형상-이미지를 구축하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전자가 여론의 향배로 그 성공을 가늠할 수 있다면 후자는 시가 만들어낸 건축물의 내적 적합성, 미학적 아름다움, 감동의 깊이 등이 열쇠로 작용한다.

만일 언어가 ‘형상-공간’에 진입하게 된다면, 이때의 언어는 익명의 삼인칭적 사건에서 ‘나’와 ‘너’가 직접적으로 대화하는 이인칭의 사건으로 전환된다.53) 작품이라는 실존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주체와 타자가 자신의 좌표와는 상관없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일종의 ‘투쟁-공간’으로 돌변한다는 말이다. 가야금에서 산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도, 코드만 있고 음표가 없는 재즈가 가능한 것도 모두 이인칭 언어로 이뤄진 ‘형상-공간’의 텅 빈 형식 때문이다. 시 쓰기에서 담론의 직접적 생산이 금기시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시가 어떤 정치적 목소리를, 혹은 경제적 구호를 고스란히 담아내려고 한다면, 그 작품은 프로파간다로 추락한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형상하는 것이 얼마나 치밀한가, 혹은 정교하고 섬세한가에 있다. 요컨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말하느냐가 관건이다. 형상화에 성공하면 담론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따라서 아무리 순도 100%의 경험을 하더라도, 그 경험은 ‘담론-공간’에 국한될 뿐이다. 형상화되지 않는 한 그것은 결코 ‘시’나 혹은 ‘시적인 것’도 될 수 없다. 시인은 그 경험에서 만들어진 ‘무엇’을 어떤 식으로든 ‘시’로 고양시켜야 한다. 당연하지만 모든 경험이 시가 변주되지는 않는다. 경험을 통한 감각과 사유의 확장, 관찰과 발견에 뒤따르는 인식의 전환과 통찰은 반드시 ‘시’의 언어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시는 경험에 있지 않으며 오로지 언어 속에 존재한다.

물론 경험이 많으면 그만큼 작품의 소재를 정교하게 하고 서사에 깊은 맛을 더하며, 문장의 신선도를 높일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경험은 창작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주 사소한 경험이라도 어떤 식으로 언어를 엮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 ‘사랑합니다’와 ‘사랑하다 죽어버리겠다’는 말의 강도와 깊이, 울림은 천지 차이다.

2008년에 작고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하무드 다르위시는 이런 문장을 남겼다.


어슴푸레한 문자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써라, 그래야 존재할 것이다.

읽어라, 그래야 발견할 것이다.

─ 마하무드 다르위시, 「배회증(徘徊症)」 중에서54)


시는 시인이라는 인물의 행동(혹은 경험)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는 오로지 ‘쓴다’라는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들과 문장으로 확장되는 시인의 사유와 감각, 그리고 이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의미의 막중한 터짐에 존재할 뿐이다. 내가 시인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내가 어느 시인의 경험을 다시 경험한다고 해서 좋은 시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경험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그 경험을 잊어버린 채 시를 쓸 때만이, 자신의 내면과 정신에 깃든 고뇌와 불면을 문장으로 밀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쓰기 위해서 세상의 온갖 것들을 경험하라는 말 대신, 다르위시는 소박하게도 ‘읽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어차피 경험할 수 있는 영역과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맨몸으로 빌딩을 오르는 ‘어반 클라이머’도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언어로 직조하지 않으면 시는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나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시’다. 시인의 취향을, 혹은 그가 만들어낸 세계를 독자의 그것과 대칭하고 교섭하게 하는 것은 ‘시’다. 시인의 ‘경험’이 아니며, 더욱이 그의 목소리도 아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무정형의, 익명이고 어둠이며 공백이기도 한 독자를 만나는 주체는 시인이 창조해낸 ‘시’다. 독자는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시에 투영하고, 바로 그 공간에서 감동을 이끌어낸다. 더글러스 케네디는 『모멘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저 창작할 뿐이다. 작품이 작가를 지배한다. 작가가 작품에 완전히 빠져들면 작품 자체의 힘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55) 맞는 말이다. 1g의 사소한 경험이라도 충분한 시적 자양분이 될 수 있다.




53) 데이빗 호이, 이경순 옮김, 『해석학과 문학비평』, 문학과지성사, 1988, 85쪽 참고.

54) 마하무드 다르위시의 문장은, 실비 재르맹의 『페르소나주』(1984북스, 2022.)에서 재인용했다. 본문 7쪽을 보라.

55) 더글러스 케네디, 조동섭 옮김, 『모멘트』, 밝은세상, 2011.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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