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자기 자신과 마주앉아

맺음말

by 박성현



여러 가지 상실 한가운데서 닿을 수 있게, 가까이에, 상실되지 않고 이 한 가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언어(言語)요.

그것은, 언어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요. 그러나 언어는 뚫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 자체의 ‘대답 없음’을, 무서운 실어(失語)를, 죽음을 가져오는 연설의 수천 겹 어둠을 뚫고 가야 했습니다. (중략)

이 언어로 저는, 그 세월에 또 그 후의 세월에도, 시를 쓰려고 해봤습니다. 말하기 위해서, 방향을 잡기 위해서, 제가 어디 있으며 저를 끌고 가는 힘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제 자신을 위한 현실(現實)을 기획(企劃)하기 위해서 말입니다.56)


인용한 글은 파울 첼란이 ‘자유 한자 도시 브레멘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의 연설 중 일부다. 여기서 파울 첼란은 자신의 시적 여정을 술회하고 있는데, 핵심은 죽음에 직면해도 언어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는 우리가 일상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러한 관습적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겪어온 전쟁과도 같은 엄청난 고통과 상처, 그리고 그 지독한 상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 있는 유언과 같다. 파울 첼란은 무(無)의 심연에서 고요히 빛을 발하는 희망을 느꼈고 마침내 침잠했던 시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그러나 언어에 접근하고 이를 품에 안는 것만으로 좋은 시를 쓰기에는 역부족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고 있으며, 도무지 닿을 수 없는 언어의 너머를 마주해서는 공포와 무기력을 느끼게 된다. 시인들이 마주하는 두껍고 단단한 벽과 같은 이 ‘너머(혹은 상실)’란 파울 첼란이 말한 실어(失語)와 같은 침묵, 곧 수천 겹 어둠에 둘러싸인 ‘죽음’이다.

그가 ‘언어’를 두고 ‘뚫고 가는 것’이라 말한 까닭은, 이 언어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아 있더라도 언어는 그곳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본다. 언어, 그것은 말하고 방향 잡고 자신을 끌고 가는 힘이자 현실을 기획하는 사유와 감각의 집적이므로, 시인이 그 언어로서 작품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뚫고 가야 하는, 언어와의 일체화라는 사건을 맞이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시 쓰기는 무엇보다 언어의 집요한 응시를 견디는 일이다.

하지면 여기에도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다. 맛의 기원은 시인에서 출발하지만, 그 ‘맛’을 구분하고 분류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시인이 아무리 의미를 말해도 그 사람에게는 공허할 뿐이다. 그 사람은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그렇지만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이 순간에도, 그 사람은 공원을 산책하거나 아케이드를 걷는다. 둘일 때도 있고, 다섯일 때도 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책방에서 오래된 시집을 발견하고는 누렇게 변색된 종이의 냄새를 쫓아 그 문장의 주인이 고심했던 새벽을 상상한다. 해변에 혼자 남아 저녁노을의 핏빛 매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 사람은 개인이지만 언제나 군집을 이루며, 의미의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그 사람에게 시는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사람이란 바로 독자다.

때문에 시 쓰기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첫째 의미는 시인이 창작하는 작품으로서, 둘째는 독자가 다시 쓰는 의미 작용으로서. 시는 독자가 존재하는 한, 항상 다시 쓰인다. 독자는 작품을 매개로 하여, 그 속에 침투함으로써 시인이 건축한 내면의 세계에 닿고, 그것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다시 세운다. 시의 언어는 놀랍도록 텅 비어 있다. 시 쓰기는 역설적으로 ‘언어’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언어를 무장해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의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어 문채(文彩)로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써야 한다. 써야할 이유를 찾지 말고, 질 좋은 경험을 하겠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꾸미거나 덧칠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써라. 오로지 자기 자신과 마주 앉아서 당신의 첫 문장을 써라. 그때,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전부인 무언가가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첫문장이자 문채(文彩)의 발화점일 것이다.



56) 파울 첼란, 앞의 책, 222쪽.






이전 23화[편견 3] 경험과 좋은 시는 비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