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세 양상

제5장 시와 편견

by 박성현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의 언어와 일상어 내의 한 좌표에 위치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양자는 모두 언어의 ‘지시적 용법’에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는 시에 접근할 수조차 없다. 가령,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라는 문장에서 ‘사랑’을 ‘달리는 행위’로 이해한다면 이 작품은 독특한 아우라를 잃어버리게 된다. 사랑은 무엇보다 우리가 공유하는 그 ‘사랑’이어야 하지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시를 쓰기 위한 마지막 준비 단계에 진입했다. 지금부터의 시 쓰기는 ‘좋은 시’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밝혀둔다. 좋은 시를 위해서는 우선 ‘시’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 곧 ‘편견’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좋다. 이 편견은 마치 아교와 같아 우리의 시 쓰기를 끊임없이 왜곡시키며, 지치게 하여 끝내는 무기력한 채 시에서 멀어지도록 만든다. 때문에 편견을 알아내고, 그것을 계속 인지하거나 극복할 때 ‘나’는 좀 더 ‘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편견은 의외로 우리의 주변에 가까이 있으며,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시는 예술가의 전유물이다.

둘째, 시의 언어는 아름답고 화려하며 때로는 현란해야 한다.

셋째, 시는 경험의 산물이다. 경험을 많이 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이외에도 시 쓰기의 세부적인 부분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편견들이 있다. 이 편견은 글자 그대로 한쪽으로 치우쳐 문장의 흐름을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재단하는 선입견이다. 보이지 않은 손이며, 정신의 기괴한 그림자다. 게다가 이 편견이 ‘나’를 흔들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특히, 편견을 극복하는 시점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 빠르면 등단 이전이 될 수 있고, 늦으면 죽을 때까지 넘어서지 못한다.

나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여전히 편견과 싸우는 중이다. 시를 쓰는데 불쑥 튀어나와서는 내 손가락을 석고로 만들기도 한다. 등단했다는 자부심이 자만이 되는 순간이고, 이로써 나의 언어는 뒤틀어진 채로 내 감각과 사유를 왜곡하고 오염시킨다. 그리고 시가 안 써진다고 쓸데없이 여행가방을 싸기도 한다. 그 시간에 책이나 더 읽으면 좋겠지만,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현관을 나서는 것이다.

물론 이 편견들이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다. 예술가라는 자긍심도 필요하고, 문맥에 따라 아름답고 현란한 문장을 구사할 필요도 있으며, 특이한 경험은 언어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편견은 편견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오류를 일으키며 언어를 망쳐놓는 바이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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