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시와 편견
시의 언어는 일상어에 비해 섬세하다.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았을뿐더러, 상당히 오랜 시간 숙성의 과정을 거친 듯 정교하고 깊이가 있으며 무게 또한 만만치 않다. 사람들은 그 문장을 암송하고 자신의 언어생활에 적극 투여하는데, 미천한 내 경우에도 학창 시절 내내 백석, 김종삼, 김춘수, 이성복, 황지우, 기형도의 시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었다. 특히 기형도는 하도 많이 읽어서 비닐로 싼 겉표지가 찢어져 새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 무렵 선배들은 내게,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권했다. 하나는 시를 읽을 때는 반드시 낭송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필사’(筆寫)하는 것이다. 소리로 듣고 손으로 직접 문자를 써나갈 때, 시는 오감에 채록되어 그 독특한 느낌과 분위기, 색과 질감 등이 오래 가며, 특히 대상 시인의 호흡의 간격과 속도, 휴지(休止)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시인의 심연으로 침잠해서는 그 문장들에 닿는다면 나의 시 쓰기는 더욱 정교해진다는 달콤한 유혹과 함께.
하지만 나는 번번이 실패했다. 낭송하기에 내 말은 너무 가벼웠으며, 필사하기에 내 손은 무척이나 산만하고도 느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 내 관심은 시에서 멀어져 있었다. 비록 간간이 습작은 했었지만, 시보다는 주로 사회과학과 철학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만일 내가 시에만 집중했었다면 나중에 등단하더라도 단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비좁은 시야는 시 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필사는 양날의 검이다. 문장의 경맥을 뚫을 수 있지만, 오히려 주화입마를 당할 확률도 높아진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선배들의 권고는 ‘나’만의 문장을 갖기 위한 효과적인 충고였으며, 때에 따라서는 살불(殺佛)의 극심한 공포도 수반된다. 체질에 맞으면 적극 활용하는 것도 좋다. 다만 낭송과 필사는 내 길이 아니었고, 나는 길고 긴 길을 돌아서야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런데 ‘나만의 문장을 가진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문장의 지문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진하는 것일까. 맞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만의 문장’이란 일종의 문채(文彩)을 가지는 것이고, 누가 읽어도 그 문장의 주체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어서 이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목표로는 더할 것이 없다. 시인으로서 내 문장의 지문이 어떤 상(象)인지를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시라. 시인이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이 정도의 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나만의 문장’은 시 쓰기와 관련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향한 최종 장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들의 흐름 속에서, 또한 나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사건들의 전개 속에서 풍화(風化)되는 느리고 장중한 말의 조각들 바로 그것이다. 오로지 나에게만 열렸던, 그리하여 나의 감각과 사유가 트로이 목마처럼 침투했던 문장이다. 시의 언어는 아름답지 않다. 화려할 수도, 더욱이 현란할 수도 없다. 시의 언어는 ‘나’에게 장착된 고집스럽고 허세가 가득하며 욕망과 충동으로 오염된 문장이다.
따라서 ‘나’는 절대 문장을 아름답게 쓰려고 하면 안 된다. 화려한 수사와 현란한 목소리를 억지로 낼 필요도 없다. 이 또한 고집과 허세와 욕망과 충동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름답기만 한 문장은 시에 내용이 없음을 직접 말하고 있으며, 화려하고 현란한 문장은 거짓과 위선이 위악(僞惡)으로서 ‘나’를 장악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나만의 문장’은 아름답고 화려하고 현란한 문장에 대한 저항을 통해 완성된다. 무기는 나 자신에 대한 ‘진실함’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리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전문52)
김종삼 시인은 시가 뭐냐고 묻는 질문에, ‘잘 모른다’고 답한다. 그는 스스로 시인이 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문단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 방송국 라디오 DJ까지 겸하고 있었으니, 적어도 그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내내 그 질문과 대답이 마음에 걸려 있다.
그는 일을 마치고 그는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걷는다.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고, 차들도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다. 남대문 시장에 도착했을 때 해는 지고 황혼이 우두커니 남아 있었다. 빈대떡과 막걸리를 시키고 허기를 채우는데, 예의 그 질문이 떠오른다. 여전히 자신은 시인이 아니어서 알 수 없다고 고개를 저어댄다.
문득 시장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분다. 그가 마주쳤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꾸준히 이어가고 전쟁의 고통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아늑한 윗방에서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슬기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며, 영원한 ‘광명’이자 다름 아닌 ‘시인’인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김종삼의 시는 소박하다. 그 어떤 수사도 비유도 우화도 덧칠되지 않았다. 시인에게 깃들어 있는 것은 그가 거리를 돌면서 마주했던, 땀에 전 사람들의 군내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며 현란한 문장이다.
52) 김종삼, 앞의 책, 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