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 안에 갇혀있다.
온기 잃은 손길은 구름마저 숨어버린 검푸른 하늘과 어딘가에 조금은 남아 있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어수선한 빛과, 대지의 숨어 있는 소음들마저 몰아내고 오롯이 나와 함께 해 줄 그 무언가를 찾느라 동그란 스탠드 불 빛 아래에서 서걱서걱 메마른 소리를 내고 있다.
얼마간의 수고 끝에 쇼팽의 즉흥환상곡 작품번호 66.
첫 부분 프레스토의 아름다운 선율이 황폐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통통 튕겨나가는 한음 한음은 슈팅스타를 한입 가득 물었을 때처럼 흐리멍덩한 나의 뇌 속에서 톡톡 터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식을 깨어내고 있었다.
오늘 밤은 전략을 좀 바꾸어 반항을 하거나 이기려 하기보다는 즐겨보기로 했다. 고맙게도 지금까지는 먹혀들어가는 듯하다.
즉흥환상곡은 첫 부분부터 매우 빠르게 정열적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쏟아내다가, 자장가처럼 감미로운 선율로 느리게 유혹하는가 하면 이때다 싶게 빠르게 매우 빠르게를 넘나들고 있다. 오늘도 자동반복을 무한반복하고 있다.
습관처럼 탁자 위의 시계를 본다. am 02: 15. 오늘도 실패다. 프레스토 부분에서는 점점 명료해져 만 가는 나의 의식과 맞아떨어지고, 라르고 부분에서는 한없이 밑으로 잡아당기는 눈꺼풀과 맞아떨어지는 듯했으나 그뿐이었다. 오히려 뇌의 왼쪽을 파고드는 묵직하고 기분 나쁜 두통은 더 심해질 뿐이었다. 눈썹과 눈두덩을 감싸며 쇠뭉치처럼 내려앉은 졸음은 온 신경을 밑으로 잡아당기는데, 반대로 나의 의식은 냉장고 속에서 꽁꽁 얼어버린 얼음덩어리처럼 점점 더 쨍하게 꼿꼿해진다. 나는 오늘 밤도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 같다.
잠이란 놈은 참 이상하다. 내가 좀 친해지려고 친밀감을 표하면 할수록 내게서 멀어지며 달아나버린다.
이러기를 오십여 일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그저 잠을 자고 싶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나는 원래 잠이랑 지나치리만치 친숙했었다. 그랬었다. 그러나 지금은 잠이란 놈에게 꼼짝없이 잡혀서 그 무엇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책을 읽을 수도 생각이란 것을 할 수도 없이 그저 멍청하게 새벽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특별할 것 없던 그 밤들을 나는 너무나 갈구하고 있다. 꿈이 없는 잠을 자고 싶을 뿐이다. 정말이지 그뿐이다.
잠이란 놈과 타협을 해볼까도 생각했었다.
수면제의 유혹을 여러 날 버텨냈다. 찬장에서 뒹굴던 와인 몇 병마저 바닥을 보이자 어쩌나 싶었는데, 요 며칠 반짝 효과를 보는 나름의 방법도 생겼다. 큼지막한 버터링 쿠키 한 개와 바이오 플레인 요구르트를 마시는 것이다. 다음날 잔뜩 불어 터진 면발처럼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마주하는 후유증이 있긴 하지만 운이 좋으면 한 시간 남짓 졸음 섞인 잠을 잘 수도 있다.
스마트폰의 시계는 이제 겨우 03시 40분을 넘기고 있었다. 주위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밤은 더욱 깊어져서 모든 숨 쉬는 것들을 삼켜 버렸다.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로 나선다. 싱크대 위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정수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른 빛깔의 불빛만이 어슴푸레 집안의 모든 것들을 검은 그림자와 함께 비추고 있을 뿐이다. 철저하게 혼자다.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 잠을 잘 수도 없고, 나를 대신해 깨어 있을 수도 없다. 나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그렇다고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지는 않다. 머릿속은 언제나 뿌옇다. 생각도 뿌옇다. 기억도 뿌옇다. 살아있는 것도 뿌옇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뿌옇다. 좀 똑똑해지려고 애를 써보지만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잠이라는 놈에게 불가항력적이다.
눈동자를 포함해서 눈 주위는 온통 졸음에 절여져, 눈을 감아도 의식은 점점 카랑카랑 명료해진다. 이 극단적인 괴리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다.
결국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96세의 철학자 김형석선생께 어느 신문기자가
만약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나이로 돌아가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다.
60세로 돌아가고 싶어요. 돌아보면 인생에서 노른자의 시기는 65세에서 75세까지였어요.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지요.라고 답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65세가 되려면 아직도 수많은 시간들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순간도 짧지 않은 나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한 점으로 남을 것이다. 일만년 전의 어느 이름 모를 누군가의 순간처럼 지금 나의 이 순간들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아무 의미 없는 순간은 아닐 것이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내일이 또다시 시작되는 이유일 것이다.
즉흥환상곡의 프레스토가 트랙을 몇 번째 오가는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는 듯 새침하게 손가락 끝을 튕겨 댄다.
까만 어둠을 움켜쥐고 있던 묵직한 커튼을 열어젖힌다.
베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21단지 아파트 창문들 중 대략 15층쯤에서 반짝하고 불이 켜진다. 이윽고, 서서히 큐브 라인이 이어질 무렵 새벽빛이 대지를 적시며 목련 꽃잎 사이로 스며든다. 그러면 몹쓸 잠이란 녀석은 새벽이란 구세주에게 나의 몽롱한 영혼을 건네준다.
잠자거나 못 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