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별오름, 닥그네 식당, 함덕해수욕장 서우봉, 항파두리항목유적지
< 4. 22. 토>
정원 끝 야자수의 허리를 부러뜨릴 기세다.
어제보다 더 약이 오른 바람.
따뜻한 옷으로 단단히 무장한다.
이틀 만에 빨갛게 익은 내 얼굴, 모자라도 잘 쓰자.
너른 주차장을 가로질러 과일주스를 파는 푸드트럭 앞에 선 차.
벌써 관광버스들이 쭉 늘어서 있다.
새별오름 발치에서 코를 박고 고사리를 꺾는 아짐들.
손에 들린 비닐봉지가 통통하게 배가 불렀다.
죽도록 배곯았던 조상들의 DNA 때문이다.
내 눈도 갈대숲 사이를 자꾸 파고드는 것이 같은 후손이지 아마.
먹이 물어 나르는 개미들처럼 앞사람 발치만 보고 거의 직각인 비탈길을 오르는 사람들.
허리를 펴고 숨을 헐떡거리는 머슴아에게 제발 오래 살려면 담배 좀 끊으라는 가시나.
동창일까, 아님?
정상에는 분화구가 없다.
미세먼지로 뿌연 시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맑은 저녁나절에 노을 구경이라면 모를까, 내 취향은 아니다.
완만하고 긴 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
중산간에 점점이 박힌 고사리 사냥꾼들.
제주도 고사리는 이렇게 씨가 마르는 모양이다.
주변에 왕따 나무가 있다고 해서 네비를 쳐보니 진짜 나온다.
누군가 사진을 올렸을 것이고, 벌떼처럼 달려들어 수다를 떨었겠지.
길옆에 차를 간신히 세운다.
호기를 부리면 뛰어넘을 것 같은 수로.
참자, 코 깨져 병원에서 한 달 보낼 수 있으니.
끝없이 펼쳐지는 파란 목초 가운데 깡마른 내 키 세배쯤 되는 나무 한 그루.
뒤로 새별오름과 이름도 없는 불쌍한 친구 오름.
사진발은 잘 받겠다.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날씨다.
변화무쌍한 제주도 날씨, 쉽게 보지 말란다.
유별나게 사춘기를 보내는 중2 같다.
주변의 맛집을 검색하니 차로 40분 거리.
말들이 새끼를 거느리고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장들 사이로 좁은 길을 따라 중산간을 돌다 보니 새별오름 입구다.
융통성 없는 네비라는 녀석이 불법유턴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착실하게 사는 일은 고생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복잡한 시내를 지나 눈에 익은 골목에 선다.
항구 근처의 닥그네 할망(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신성로10길 18)
닥그네는 용담의 작은 포구 이름이고, 그곳에 사시던 할머니가 어려서부터 먹었던 맛을 살린 몸국, 고사리 해장국, 접착뼈국을 파는 곳이다.
국물은 사골을 오래 끓여 진하고,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아 맛이 순하다.
고사리나 미역의 건지가 다 녹아 마치 보약을 먹는 것 같다.
지금까지 먹었던 맛과 전혀 다르다.
육지의 손이 타지 않은 제주 원형의 맛이라고나 할까.
먹기에 좋게 적당히 식혀서 나오는 것도 좋다.
새콤달콤한 무생채, 아삭아삭한 배추김치, 맛이 깊은 오징어젓갈은 두세 번 더 불러야 한다.
장작이나 팰 것 같은 아들이 김치들보다 더 서근서근하다.
몇 번 올 것 같다는 아내.
음식에 관해서는 얄짤 없는 아내가 엄지척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빵집, 행복밀(제주시 서광로 239, 상도 1동 553-4)
초록 녹차 크림이 빵빵하게 들어있는 녹차 크림빵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죠리퐁 한 봉지로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아내가 한자리에서 세게도 거뜬하게 해치우고 만다.
마늘 바게트도 맛있는데, 경기도에서는 먹을 수 없어서 안타깝단다.
함덕해수욕장, 서우봉으로 가자
바람은 다시 사나워졌다.
아니, 가는 곳마다 날씨가 다르다고 해야 맞다.
가까운 곳을 찾아가려 해도 기본이 40분이니 제주도는 만만한 크기가 아니다.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파도.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웨딩사진 찍는 예비부부, 주인 따라 나온 개들.
눈부신 모래 해변, 출렁이는 비취색 바다, 몸을 날릴 것 같은 바람.
함덕해수욕장은 지금 축제다.
완만한 경사길을 따라 오르는 망오름.
유체는 거의 끝물이다.
일출 맛집 정상에 서면 김녕 해안, 월정리, 세화가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인다.
미세먼지만 아니면 일출봉 우도도 훤히 보일 텐데.
집에서 멀지 않으니 한 번쯤 일출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와야 할 듯.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 해안 길을 돈다.
제주도 한 바퀴를 바다를 바라보며 돌 수 있다면.
야속하게도 동네 끝에서, 바다로 향하는 천을 만나면 육지를 향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찻길.
사람 많고 자주 가본 이호태우해변으로 가자.
섬 하나 가리지 않는 애월의 앞바다를 밀고 들어오는 파도.
파도 맛을 보면 집도 절도 필요 없이 세상을 등진다는 서핑 파들이 차지한 해수욕장.
트로이 목마를 생각나게 하는 흰, 빨강 목마.
훤히 보이는 카페 MILIRO(제주시 해안로 136, 2층)
제주말차라떼, 아아.
바다를 보며 몇 시간씩 멍때리는 것도 적응해야 할 일.
커피의 속쓰림도 없어졌다.
맞바람을 맞으며 뛰는 아저씨의 펄럭이는 셔츠가 울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로 가자.
제주에서 제일 많이 보는 유채꽃이다.
성의 흔적들을 보고, 마지막 원나라에 대항했던 삼별초의 몸부림도 느껴보자.
토성을 등으로 받치고 있는 홀로나무, 보리밭, 마른 유채밭을 본다.
털이 선 마른 눈빛의 들개는 토담 아래를 어슬렁거리며 은근히 겁주고 있다.
도로에서 400m 떨어진 살 맞은 돌
갈라진 바위 사이로 살이 꽂혀있었다는 구멍도 있다.
삼별초 훈련으로 쏜 화살이 박혔단다.
40년 전까지는 화살촉도 있었다니, 믿어야 할지.
이야기는 만들어야 맛이다.
새별오름, 닥그네 할망 점심, 함덕 서우봉, 태우해변, 항몽유적지, 활 맞은 돌.
오늘도 빡빡한 하루였다.
옹기종기 아짐이 싸준 파김치와 열무김치로 먹는 전복 김밥이 겁나게 맛있다.
내일은 어디로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