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재와 존중

by 똘이엄마

한 유투버가 ‘자살 예정 영상’을 올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 후, 스스로 생을 접었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속담이 있다.

아기들은 필요한 게 있으면 무조건 운다. 자신의 상태를 주변에게 알릴 수 있는 유일한 한 수단이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생각을 알리고자 하는 강한 동기가 글을 쓰게 만든다.


이 모두에게는 타인에게 자신이 ‘존재함’을 알리고자 하는 공통 의도가 있다.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바로 이 존재의 표현인 것이며, 예외는 없다. 각각 존재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상호 교류가 발생하는데 이를 관계라고 하며, 이 관계들이 모여 사회라는 집단이 형성된다. 유감스럽게도 이 과정은 항상 좋게만 이어지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갈등이라는 존재 간의 부딪침이 발생하고, 때때로 이 부딪침은 존재 자체가 파괴될 것 같은 가공할 위력을 가진다.

삶이라는 여정을 이끌어 나가기도, 훼방하기도 하는 주체인 존재의 정확한 정의와 그 본질에 대한 탐구는 효율적이고 이로운 삶의 방향을 정하기 위한 기준이 된다.


<존재> 란 무엇인가?


존재(存在)

현실에 실제로 있음. 또는 그런 대상.

존재-감(存在感)

사람, 사물, 느낌 따위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


생명체는 존재하며, 존재감을 갖는다. 존재감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일차적인 것은 생물학적 존재감이다.

모든 생명체에 해당하며, 감각을 통해 인식이 가능하다. 우리가 본능이라고 부르는, 생존에 필요한 여러 욕구들을 실행하는 존재가 이에 속하고 물질적이며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정의된다.

이차적인 것은 사회적 존재감인데, 이는 다시 스스로 정의하는 영역과, 타인의 반응에 의해 형성되는 영역의 두 가지 로 나뉜다. 생물학적 존재감의 보편적 절대성과 달리, 개인의 주관적인 기준이 상당부분 반영되므로 가변적이며 상대적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자신만의 사회적 존재감의 필수 구성 요소가 확실 해지는데, 이를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라고도 한다.

존재감구성.jpg


생물학적 존재감의 가치는 ‘살았는지 또는 죽었는지’에 따라 좌우되며, 이는 나아가 사회적 존재감의 전제 조건이 된다. 즉, 생물학적 존재감이 없다면 사회적 존재감은 애당초 생각할 수가 없다.

사회적 존재감의 가치는 ‘의미의 유무 ‘이다.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의미를 확신하지 못할 때 ‘살 가치가 없다’ 고 괴로워할 정도로 존재감을 지탱하는 지대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생물학적사회적존재감.png



존재감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


감각(感覺)

1)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

2)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


단체 사진을 볼 때 우리는 자기 모습부터 확인하느라 바쁘다. 누군가에게 가려져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때 그것이 분개할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존재는 실재하는 사실이고, 감(感)은 이를 확인하게 하는 감각 또는 정서를 말한다. 즉, 존·재·감·이란 실재(존재)와 그에 연결된 감각과 정서가 결합함에 따른 산물인 것이다.


존재감.jpg


존재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감각을 통해 정서가 반응한다. 배가 부르면 포만감을 느끼고, 칭찬받았을 때 들뜬다. 반대의 경우 불쾌감이나 좌절을 느낀다. 감각을 통한 존재감은 결국 ‘살아있음’의 증거가 된다.


감정(感情)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

정서(情緖)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


감정의 발달1.jpg
감정의 발달2.jpg

감정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복잡 다단한 정서는 감각에 그 뿌리가 있다. 두 단어 모두 한자의 첫 글자가 感으로 동일함에 주목해 보자. 감각은 외부 정보를 뇌에 전달하고 분석을 거쳐 감정을 유발한 후 그에 따른 신체의 반응이 나타나게 한다.


감정을 신체 감각으로 표현하는 사례


감정의 신체표현.jpg

어떤 상황에 대한 감정 반응은 위와 같이 신체 반응으로 묘사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 뜻을 알아듣는다. 이로써 감정 반응은 신체에서 나오는 감각 반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 작품, 특히 시에서 감각을 통한 감정의 표현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한용운, 님의 침묵)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흘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 꽃)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인간의 부정적인 여러 정서의 기원이 불쾌감이라고 할 때 결국 우리의 ‘속상한’, ‘슬픈’, ‘섭섭한’. ‘분한’ 같은 감정은 모두 배가 고플 때 우는 아기의 감각적 불쾌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감정의 합리적 이유를 따져 보려는 이성의 판단은 종종 이 원시적인 감각에 압도당해 왜곡되기 일쑤이다.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순간 ‘왜?’ 라는 논리를 따질 여유란 없는 것이다. 이 불쾌감은 생물학적 존재감(사느냐 죽느냐)과 맞닿아 있어 엄청난 에너지를 동원, 쓰나미처럼 모든 것을 덮쳐 원래 모습을 짐작할 수 없게 뭉개 버린다.


정체성 (正體性)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인간이 평생을 통해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존재의 증명서이다. 개성(個性, 다른 사람이나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과 비슷하나 주관적인 의미가 더 부여되어 있다.

정체성에서 사회적 존재감의 비중은 크다. 사회적 존재감의 두 요소가 자아 내부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안정된 존재감을 얻을 수 없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스스로는 심한 열등감으로 괴로워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 확고한 정체성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균형(均衡)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


무엇이든 단독으로 있을 때는 균형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둘 이상의 요소가 한 개체안에 포함될 때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존재감에도 적용된다.

생물학적 존재감과 사회적 존재감의 비중이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었을 때 건강한 존재감을 기대할 수 없다. 균형 잡힌 존재감은 제대로 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는 살아가야 할 <이유> 와 <동기>를 만들어 낸다.


존중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

존중감 (尊重感)

높여 귀중하게 대하는 마음.


사회적 존재감을 형성하는데 인간 간의 상호작용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적 존재감을 요리된 음식에 비유한다면,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하는 존중은 그 재료가 된다.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적절한 소통 방식이 필요하다. 문제는 개개인 각각이 갖고 있는 존중의 기준 중 상당 부분이 자신만의 주관을 포함하며, 소통 방식 역시 자신의 기준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나만의 기준>에 의한 소통은 본의 아니게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한마디로 모든 갈등의 원천은 ‘존중받지 못했다’ 라고 느끼는 데 있다.


타인에 의해 똑 같은 정도로 다친 사람이 있다고 하자.

.

1) 한 사람은 강도를 만났다.

2) 한 사람은 교통 사고를 당했다.

3) 한 사람은 싸움을 걸다가 도리어 맞아서 다쳤다.


피해자의 입장은 다친 정도에 더 민감하고, 가해자의 입장은 다치게 한 이유에 비중을 둔다. 2,3 번의 피해자가 고통이 심한 나머지 가해자에게 ‘넌 강도하고 다를 바가 없다’ 라고 한다면, 가해자는 엄청나게 분노할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 대한 배려 즉 ‘존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려는 결과 그 자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고려를 포함한다. 결과가 같다고 실수나 방어 목적의 행위를 악의에 의한 폭력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잘못한 상대방이라 하더라도 그 입장을 존중해 참작한 부분을 반영해야만 공정한 반응이 된다.(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한 사실이 없던 일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솝 우화 여우와 두루미의 이야기는 존중(존재감의 인정)의 좋은 예이다.

여우는 두루미를 식사에 초대하여 두루미가 먹을 수 없는 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 놓은 탓에 두루미는 음식을 먹지 못했다. 화난 두루미는 이번에는 여우를 초대하여 여우가 먹을 수 없는 목이 긴 병에 음식을 담아 줌으로써 복수를 한다.

교훈: 여우는 두루미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노를 샀고 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받았다.


이야기는 마치 여우가 두루미를 일부러 골탕먹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은 단순히 두루미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려는 좋은 의도로 한 일이었을 가능성이다. 만일 악의 있는 행동이었다면, 바보가 아닌 다음 두루미의 초대에 그렇게 경계심 없이 응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존중의 갈등도 이와 같다.

의도적으로 타인을 무시하려는 시도는 드라마에서나 흔한 일이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악의 없는, 때로는 호의를 가지고 행했던 일이 심한 갈등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경우는 부모와 자녀 갈등이다.

부모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가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권하거나 시키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견만을 밀어붙여 여지를 주지 않을 때, 자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부정당했다고 받아들인다. 한마디로 자녀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부모의 행위가 자녀로 하여금 부모의 간절하고 선한 뜻을 감정적으로 거부하게끔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고의로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쉽사리 ‘내 맘 같은 줄 알고’ 타인에게 기대하고, 나의 행동을 ‘내 식대로’ 이해해 주리라 당연한 듯 예상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동일한 존재는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흔히 ‘공감(共感) ‘이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정 유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을 분석하고 그에 알맞은 자신의 감정을 선택하여 표현하는 지극히 이성적 과정으로 봐야 한다.


힘든 일을 당한 사람 A가 있다. A는 말이 없고 낯을 가린다.

지인 중 수다쟁이 B는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들이 만났는데 B는 안쓰러운 마음에 일단 위로의 말을 건넨 후 이어서 요즘 상태는 어떠냐, 나 같으면 하루도 못 견뎠을 것 같은데 대단하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그 당시 이렇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 등등 전방위적 관심을 표현했다. A는 심히 불편했으나 성격 상 대꾸하지도 못하고 이후 B를 피하게 됐다.


내가 아닌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시도가 빠지면 타인을 어떻게 존중해야 할 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존중의 부재는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들고, 존재감의 불확실성은 당사자를 분노하게 만들어 상호 작용을 틀어지게 한다. 존재감의 부재야말로 개체의 생존 가치를 위협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 위기감은 우리가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불사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에 불을 붙인다.

공과 주사위가 있었다 그들이 한 공간안에서 지내게 됐다.

공이 말하기를,

‘너는 왜 닿을 때 마다 나를 콕콕 찌르는 거야?

왜 나 한테 함부로 해?’

주사위가 말했다.

‘너는 왜 아무 때나 달려들어 날 툭툭 치는 거야? 왜 나 한테 함부로 해?’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개미가 다투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미는 그들에게 설명했다.

주사위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닿았을 때 찔리는 느낌을 받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공은 의도치 않게 굴러가 상대방에게 부딪칠 수도 있다는 것을.

공은 들어가 앉을 수 있는 틀을 마련해서 아무 때나 구르지 않도록 했고,

주사위는 공이 활동할 때 보호대를 모서리에 걸치기로 했다.

이후부터 그들은 평화롭게 지냈다. 가끔 상대방에게 신경을 써야 했지만 둘 중 누구도 혼자 지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잘못을 했었고, 조정이 이루어지자 각각 이전보다 제약이 생겼음에도 만족을 얻었다. 자신이 존중받았다는 생각에 상대를 배려한 결과이다.

공과 주사위는 자신들의 존재감이 간과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