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이 마무리
2025년 7월 31일, 알리칸테 마지막 날이다
1. 진짜 하고 싶은 걸 찾는 방법 a.k.a. 아침 댓바람부터 잡생각
첫 번째 방법. 먼저 돈을 넘치도록 벌었다고 가정한다 -> 사고 싶은 걸 다 샀다고 생각한다. (집? 차? 명품? 그게 뭐든 좋다.) 자, 그래도 돈이 남았다. 이제 뭘 하고 싶지? 두 번째 방법. 내가 6개월 뒤에 죽는다고 생각한다. 자, 이제 뭘 하고 싶지? 세 번째 방법.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 뭘 하고 싶지?
2. 마지막 날, 츄로스와 빠에야
마지막 수업은 R선생님과 함께 1시간은 스페인어로, 1시간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마지막 수업이라서 대단한 학습목표가 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좋아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과 “Pay it forward", "Favor bank" 같은 개념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R은 까칠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공동체를 아끼는 좋은 사람이다. 예상치 못 한 작별 선물을 또 받았다! 두 번째 선물인 데다가 R은 선생님이니까, “스페인 사람들은 원래 선물을 잘 챙기는 편인가요?” 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루나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죠.” 라는 멋진 답변을 받았다.
빠에야를 아직 못 먹어봤다는 나의 말에 어학원 선생님들과 점심 식사 시간이 마련되었다. 한 달 동안 세 명의 선생님을 만났고, 어학원에서 근무하는 다른 선생님 두 분까지, 왠지 모르게 회식에 초대된 모양새가 되었지만ㅎ 점심 약속이 1시라서 남는 시간에는 츄로스를 먹어 보았다! 간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이탈리아에서도 한 달 동안 젤라토 1회, 스페인에서도 한 달 넘게 츄로스를 먹을 기회가 없었는데 다행히 마지막날 먹어보네요ㅎ 츄로스는 결국 튀긴 밀가루? R선생님으로부터 추천받은 유명한 곳이었는데(손님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저 느끼하고, 초코는 너무 많고, 맛있었는지 잘 모르겠다ㅋㅋ 오후에는 츄로스를 안 먹는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사람들도 그렇고 스페인 사람들도 그렇고 아침부터 설탕을 때려먹는 유러피안의 췌장에 항상 놀란다.
스페인어 선생님 다섯 명과 함께 빠에야를 먹었다. 그 중 한 분은 영어를 거의 못 하셔서 점심 먹는 내내 강제로 스페인어를 청취했다. 대강 알아듣는 것도 있었지만 점점 머리가 터져나간다. 오랜만에 외국어 때문에 울렁거리는 경험이었다. 오래전 영어를 배울 때도 외국인 친구집에서 밤새 파티를 한 적이 있다. 아침이 되니까 한국 드라마 보고 싶더라. 그래도 식사 자리에서 뭐라도 대답할 수 있다는 건 실력이 늘고 있다는 증거다. 스페인어 영상을 무조건 많이 봐서 귀가 트이도록 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어는 많이 늘었는데 리스닝은 맥락 파악이 필수인 것 같다. 점심 식사가 끝났을 때는 스페인어 청취에 너무 질려서 목요일 오후에 있는 마지막 그룹 수업을 그냥 취소해 버렸다. 너무 괴로워요.. 선생님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마지막 날이니까 꼭 바다에 가야겠다.
3. 최종 스페인어 레벨
오늘의 알리칸테 해변에는 사람이 더 많고 물이 진짜 더럽다. 8월 휴가 시즌이 시작되면서 관광객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진흙 같은 모래에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예쁜 바다 색깔은 기대할 수 없었다. 마지막날이니까 멋진 풍경을 보겠다며 버스와 트램을 타고 다른 해변까지 두 군데 더 가 봤으나 그냥 똑같이 흙탕물이야ㅠ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받아들이고 까바를 달리기 시작했다ㅎ
오늘의 스페인어 레벨은 매우 만족이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한적한 해변의 어느 바에서 술과 안주를 주문했고, 모르는 메뉴가 어떤 건지 스페인어로 질문했고, 애매한 문장으로 타파스바 직원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적당히 유창한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아들은 것과 전혀 다른 안주가 나왔으므로ㅋㅋㅋ 가야 할 길이 멀구나. 대충 달걀과 햄을 듣고 주문했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키쉬였구나! 하지만 제주 단골 카페에서 먹은 키쉬가 더 맛있었는데 말이죠ㅎ 산미가 가득한 까바는 찰떡 같이 내 취향이었고 바람이 강해져서 너무 추워질 때까지 한참 동안 파도를 바라보았다.
술에 취할수록 잡생각이 솟아난다. 몸은 원체 건강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삶. 친구나 연인의 힘을 빌려서, 나중에는 상담의 힘을 빌려서 마음의 건강을 찾아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찌저찌 나만 알고 나만 괴로운 드라마를 지나서 스스로 마음의 건강을 찾아가는 중이다. 여전히 불치병이지만 잘 관리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밤이었다.
4. 마지막날 어땠나요?
마지막날, 관광객에게 가장 어울리는 하루를 보냈나? 스페인어 수업을 겨우 마무리했고(반 정도는 영어로) 츄로스를 먹어보고 어학원 식구들과 빠에야도 먹어봤다. (츄로스와 빠에야 모두 떠나기 직전에 먹어본 게 레전드다.) 알리칸테 해변 세 군데를 차례대로 방문하고, 까바를 마셨고, 결국 산타 바바라 성에는 가지 못 했다ㅋㅋ 인도여행 3개월 동안 타지마할 안 갔고 파리 갔지만 루브르 못 간 레전드가 오늘도 이어지는구나.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하루는 꼭 해야 하는 일들을 29일 동안 성실하게 완료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날이다.
5. 한달살이 결과
20일, 총 40시간 동안 스페인어 1:1 수업을 들었고 3일, 총 6시간 그룹 수업에도 참여했다. 4주간 주 3일, 총 12시간 필라테스 훈련을 통해 근육이 늘었다. 5회 정도 바차타 클래스에 다녀왔다. 바차타보다 약간 더 자주 바다에서 놀았다. 브런치 글 발행을 시작했고 향후 3개월 동안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 너무 더워서 힘들었고, 자주 피곤했지만, 알찬 한달살이였네. Adiós, Alicante. Muchas gracias a todos! 안녕, 알리칸테.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