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8. 폰 프리아/ 종달 바당

by 순쌤

베가 데 발카르세 ~ Fonfria 25.3km(633.9km)-‘Reboleira’

오늘 많이 긴장한 날, 그러나 산을 오르는 날이므로 크게 염려는 않는다. 올라봤자 등산이니까. 7시 전 출발, 짐은 맡겼으니 순조롭게 출발한다. 약 3km 지나서 만난 Las Herreris 마을에서 아침을 먹다. Faba로 가는 오솔길, 아름다운 숲길을 만나다. 너무 좋다며 방정을 떨다. 어제 빗길의 아스팔트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시련이 시작되다.

안개가 나타나고, 길은 젖어 있고, 질척이는 길에는 온통 소똥 천지... 여기저기 지뢰처럼 널려있어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오 세이브 레이’, 우리가 걷는 길의 가장 높은 곳 정상이다. 이 길에 이르기까지 신경이 곤두선다. 주변의 길과 산등성이를 볼 여유도 없이 바닥만 살피며 걷게 되다. 심지어 어제의 그 힘겹고도 깔끔한 아스팔트가 그리워지는 상황이 되다.

이게 뭔가... 다른 이들은 오르막이 힘들다고, 다들 그렇게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내게는 오르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길, 그 질척이는 길, 이런 부자유함이 있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다.


정상 오세브레이는 우리나라 노고단 같은 느낌이다. 열심히 올라가니 거기에는 관광차, 많은 관광객들이 있는 거다. 뭔가 속은 듯한? 무서운 전투를 간신히 끝내고 왔는데, 여기는 원래부터 평화였다는, 우리 뭐 했지? 이런 분위기였다. 확실히.

그 정상엔 안개에 젖은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고 한다. 분위기 있고 유서 깊은 성당을 배경으로 관광객들과 순례객들이 기념촬영하고 감동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 자신에 대해 의욕을 잃었음을 알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그 아름다운 길 앞에서 그 사소한 소똥으로 인해 내 영혼이 또 상처를 받고, 그런 나에게 나는 또 상처를 받았음을 알다.


차와 함께 걷는 아스팔트길 이후로 오늘은 자연에게 상처를 받다. 미안하다. 자연에게.

갈리시아로 넘어오면서 길의 풍경은 이렇게 완전 달라졌다. 안개와 숲과 소똥들의 잔치.... 안개 자욱한 그 신비한 숲 터널은 주욱 이어진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러나 사실 마음속은 긴장이다. 웃픈 일이다.


오브로세이로의 성당부터 ‘리나레스’라는 곳까지의 약 3km.

길은 비에 젖은 황금빛 잔 돌로 다듬어 놓여있다. 양 옆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한쪽 나무 너머는 산 아래 평야를 보여주는데 안갯속에 보이는 풍경이 압권이다. 아스팔트 아니고, 진흙길 아니고, 찻소리 나지 않고, 소똥 없고, 숲길이다.

이렇게 완전한 깔끔한 길이 비단길처럼 깔려있다. 상처받은 내 영혼을 잠시 치유해 주는 명품길 3km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내 절망적인 기도를 불쌍히 여겨 들어주신 것처럼 딱 그 순간에 나타난 길이다.


그리고 ‘포요’ 정상 1335m. 저 아래 산맥들이, 곳곳의 마을이 보이는데 ‘성삼재’ 느낌이다. 그 정상에서 커피하고 맥주하고 점심을 멋지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멋없고 이따만한 커다란 개가 카페 앞에 늘어지게 누워있는 통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다. 배가 고프다만... 3.5km만 더 가면 오늘 묵을 숙소가 나온다. 이제 여기 갈리시아 지방의 표지석은 산티아고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가르쳐준다. 149km 남았단다.


‘레볼레이라’ 알베르게. 좋은 알베르게라고 알려져 있다. 숙소는 깨끗하다. 굉장히 넓은 도미토리방이 몇 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주인아주머니는 엄청 쾌활하며 강한 인상이다. 이 지방에는 여자들이 억척이란 정보도 있다. 식당으로 이동하여 저녁을 먹다. 널찍한 공간에 아주 많은 사람들, 아주 많은 요리들, 그리고 주인아주머니의 춤과 독주 만드는 개인기가 쇼처럼 펼쳐진다. 이거 순례길 맞아? 식당 안이 열기로 터져 나갈 듯하다.


지금까지의 알베르게의 분위기와 매우 다른, 아주 열정적인 분위기다. 난 숙소와 식당까지의 길에 퍼질러진 소똥들 때문에 또 불편한데, 다른 사람들은 꽃길을 걸어왔나, 완전히 충분히 이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다.

프랑스인 아저씨가 옆에서 말이 많다. 샤모니 출신이고 스키 코치란다. 평창올림픽 때도 왔고 제주 올레도 한라산도 다녀갔다고 자랑한다. 나는 몽블랑 트래킹을 했고 샤모니를 다녀왔다고 자랑한다. 여기 오기 위해 은퇴를 했다니까 정말이냐고 자꾸 묻는다. 마구마구 놀란다. 은퇴할 나이가 아니란다. 너무 젊단다.... 메르씨 보꾸!

오늘은 오브로세이로 교회에서 Y 형님을 위한 기도를 드리다.


21코스 제주해녀박물관~종달바당 11.3km

우리는 마지막을 향해 간다. 오늘 걸으면 내일 마지막이라는 의미의 오늘.

제주해녀박물관을 지나면 바로 언덕을 넘어 당근밭, 열무밭길, 그리고 별방진의 그 석축들을 지난다. 그리고 바닷길, 봄에 문주란이 핀다는 토끼섬을 지나 하도해수욕장을 거쳐 지미봉을 향한다. 역시 아름답고 초록초록거리는 길.

드디어 지미봉, 어휴, 정말 지속적으로 오르는구나.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트이고, 거기에 바로 앞에 성산일출봉, 우도, 잘 짜인 종달리의 밭들, 바다와 항구... 말해 무엇하리의 풍경이다. 다시 주르륵 내려온다. 만만치 않다.

그리고 종달항, 한참을 걸어 종점에서 도장 쾅! 드디어 한 코스 남았다구!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 31일, 그냥 식당밥 먹을 수는 없다. 생맥주집에 가서 안주와 함께 저녁을 먹자.

생맥주 특별히 시원하고 맛있다. 말해 무엇하리의 맛!

이런저런 소소한 수다, 그러고 10월의 마지막날을 보내다. 편의점에서 제주 맥주 백록담 사다가 꼬북이과자랑 2차 하다. 참 맛있고 유쾌하다. 힘든 일 잘 겪어내고, 한 달이란 기간을 싸우지 않고 서로 봐주면서 살아온 것이 보통 일이냐? 잘했다. 기특하다. 서로에게 칭찬해 주고 감사하고, 그러고 이렇게 일기 쓰고 잔다. 내일 하루도 잘 부탁해. 내 몸, 내 다리, 내 발!

keyword
이전 26화26. 카카벨로스/ 한라산 백록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