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온 거리와 남은 거리를 계산기로 두드려보니 193.8km, 200km가 안 남았다.
오늘은 짐을 맡기고 걷는 날, 여러 마을을 지나왔다. 깜뽀, 폰페라리, 깜뽀나라야... 집도 많이 보고 아스팔트도 강변도 공원길도 오솔길도... 다양하게 걷다. 낮에 햇살이 강렬하여 덥다. 23~ 24도 정도일 텐데 바람 없고 그늘이 없어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상쾌하게 내리는 햇살이다.
중간에 와인 협회에서 운영하는 와인 시음장 Bar가 나타나니 참새가 방앗간 지나칠 수 있으랴, 간단한 안주로 와인 한 잔 한다. 1.5유로. 먹을 때는 좋았는데 걷는데 다리에 힘이 빠지고 느슨해진다. 센 와인인가?
그래도 기분이 좋다. 워낙 술을 좋아하고 즐기기는 하지만 내 정량은 딱 한두 잔이다. 좋은 사람과 같이 하는 시간과 분위기를 즐기는 술사랑의 철학에 대해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만....
오늘 거리는 23km인데 짧은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부담 없이 걷는다. 힘이 드는 것은 기본이나 충분히 걸을 만하다는 것이다. 잠시의 알딸딸함은 잠시 다리에 힘을 빼기도 하지만 걷는 길에 유쾌한 힘을 준다는 술힘의 역설.
숙소는 4인실로 배정됐다. 짐이 아직 안 왔다. 2시가 되어 가는데... 전력이 있어 잠시 불안했으나 다른 짐들도 안 왔다 하니 늦나 보다 잊고 점심을 먹다. 그러는 사이 짐이 오는 걸 본다.
짐 운반 회사 하코트렌의 작은 봉고차, 그 안을 꽉 채운 배낭들, 여자는 운전을 하고 남자는 어깨에 배낭을 대여섯 개 메고 알베르게에 떨어뜨려놓는다. 한 사람이 들기에도 무거운 배낭을 대여섯 개씩이나 덥석 메고 들고...
순례자들은 그날 메고 가지 않을 짐을 하나에 5유로씩 봉투에 넣어 알베르게에 맡겨놓는다. 그러면 저렇게 봉고차가 아침에 알베르게를 돌며 배낭을 수거하고 순례자가 써놓은 다음 목적지 알베르게에 갖다 놓는 것이다. 이것도 여기서는 경쟁이라 하고 산티아고 가까이에서는 경쟁이 심해 3유로로 가격이 떨어진다고 한다.
어디나 먹고살기 힘들고, 처음에 뭔가 아이디어다 싶으면 바로 경쟁이 이어지고....
짐이 좀 늦어진다 해도 투덜대면 안 되겠다. 감사하며 이용해야겠다. 짐을 맡기면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짐을 지고 다니면 그 나름의 뿌듯하고 안정적인 장점이 있다. 우리는 거의 반반으로 이용했던 것 같다.
이제 8일 남았다. 내일 걸으면 이틀이 힘들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10년 전 걸었던 Saria가 나타난다.
아, 이제 종반부의 시간이다. 아쉽기도, 얼른 숙제를 끝내고 싶기도...
저녁을 먹고 오다. 한 아저씨가 우리를 처음 봤다며 맛있는 식당이 있다고 숙소 옆 골목으로 안내해 준다.
굳이 메뉴델디아 아니어도 되는데 10유로로 포도주 한 병, 물 한 병, 세 코스로 나오는 근사한 음식이다. 가성비 최고, 너무 맛있다.
비가 흩뿌리는 저녁, 포만감, 행복감.
트럼프가 정은이 만나는 것을 취소한 아주 기분 나쁜 날인데, 나는 밥으로 행복해 하고 있다.
K네와 딸아이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정의롭고 여유로운 삶 살았음, 회사 생활도 그렇게 했음, 그리고 친구이자 동지 같은 사람을 만났음 하는 엄마의 소망을 기도드린다.
한라산(성판악~백록담~성판악)
드디어 한라산을 가다. 이번 걷기의 목표는 올레길 완주와 한라산 등반!
올레 걷기를 쉬는 일요일에 맞춰 성판악 등반을 예약해 놓았다.
아침 6시 30 버스 출발, 아침용 간식과 점심용 발열 식품 받고 성판악까지 편하게 간다.
7시 10분 입구에서 큐알체크 하고 출발! 4시까지 내려오란다. 굿!
패딩 하나 입으니 몸에 적당한 온기가 돌고 날은 맑다. 몸 상태는 쾌적!
이미 오르고 있는 사람이 많다. 등반 예약 인원이 다 찼다고 한다.
왕복 9시간 예상하니, 올라갈 때 5시간, 내려올 때 4시간 잡으면 되겠다.
올라가는 길, 계속 오르막 길이다. 숨이 차긴 하지만 그동안 단련된 다리는 건재하다.
속밭 대피소까지 한 시간 반,
진달래대피소까지 한 시간 반,
정상까지 한 시간 반.
계속 오르막이란 걸 새삼 느끼는 길, 내려올 때가 험난하겠군 생각하게 하는 길, 뒤 돌아보며 굼실대는 오름들, 그 오름 중 최고의 오름에서 보는 제주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풍경에 감탄하며 오르는 길...
이제 백록담까지 계속 나무계단이다. 백록담이 한참 저 위인데 백록담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늘어서 있다. 백록담에게 먼저 인사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올라오면서 그 줄에 합류하게 된다. 무슨 인증 때문에 서있는 줄 같다. 우리는 인증 안 해도 된다. 그냥 올라간다. 그 표지석 옆에 돌에 앉아 찍어도 되겠다. 백록담이라는 표지는 나오니까.
백록담을 보다. 가뭄에 물이 없어 황량한 들판 같기도, 태곳적 광활한 벌판 같기도. 그 자체로 멋지고 감개무량이다.
일단 물 없는 백록담 동영상 찍고, 한 바퀴 돌다. 표지석 앞에는 그 긴 줄이 저 아래 끝없이 늘어져 있고, 우리는 표지석 옆에서 기다리다 틈새를 타 사진을 찍는다. 그 정도면 훌륭하다.
날씨가 축복 같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좋은 풍경과 좋은 기운을 나누고 있다.
하산.
천천히 내려올 것이다. 이제 주변도 더 자세히 보며 내려올 것이다.
가을이 보인다. 단풍이 예쁘게 들었다. 올라올 때 보지 못한 가을이다. 햇빛 때문에 보이지 않았나? 힘들어서 볼 새가 없었나? 감탄하며 사진 찍고 여유 있게 내려온다.
백록담 비석 앞에 사진 찍으려 두 시간 기다렸다 사진 찍고 내려오는 길이라며 일행이 우리를 앞질러 막 뛰어내려 간다. 저렇게 뛰어 내려가도 될까. 내일 못 걸으시면 어쩔? 우리도 조금 걸음을 빨리한다. 내려오는 길인데 무리하지 않기. 잘못 삐걱이면 좋은 시절 끝이다. 남은 올레길도 물론 끝이고. 그러나 좀 빠른 걸음으로 내려온다. 3시 45분 버스 도착. 참 잘했다. 우리는 오늘 너무 잘했다. 설악산에서 발을 겹질린 후 올레길 걷기와 산행을 걱정했던 친구가 더 감격한다. 우리 언제 이런 기회나 경험이 또 가능할까 싶다.
숙소에 와서 씻고 외식을 하러 간다. 돔베고기에다 막걸리로 축하하자. 우리 자축하자. 너무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