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프리지아 꽃이 그려진 카드를 골랐다. 코에 가까이 갖다 대면 진한 향기마저 날 듯하다. 나의 이름과 남자친구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된 청첩장을 받아 들고 보니 '이 결혼 진짠가 보다' 싶다.
청첩장 한 움큼을 집어 들어 가방에 구겨지지 않도록 안전히 넣어 두었다. 내일 출근할 때 들고 갈 참이다. 요즘은 모바일로 간단히 안내를 한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한 지인들에겐 한 장 한 장씩 소식을 전하며 카드를 전해드리려 한다. 놀라겠지, 싶은 생각에 전철 안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살짝 쑥스럽다.
한라산이며 태백산이며 함께 다닌 회사 동생들에게도 전했다. 지난 일들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들이다. 식 날짜는 물론 한 달 후 신랑이 될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말고다. 커피 한잔하자며 카페테리아에 모인 여자들, 하나같이 웃으며 다가온다.
"언니, 진짜 하네?! 뭐야 제일 먼저 하고."
"그러니깐. 제일 늦게 할 거 같더구먼 선빵 날리네."
"안 되겠다, 나도 언니 따라 테니스 시작해야겠어. 형부 같은 남자는 다 코트에 모여있는 거 아냐? 등산이고 수영이고 다 때려치워야겠어."
"언니는 진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형부 같은 남자를 어디서 찾아. 없어 없어."
"그러니까. 나이도 어려, 성실해. 운동도 잘해. 잘생겨.... 언닌 정말이지 전생에 나라를 한 번도 아니고 한 서너 번은 구했나 봐. 그러지 않고서야."
까르르... 웃고 웃는 여자들이다. 요란스러운 소리에 지나던 직원들도 무슨 일이냐며 하나둘 모여들고, 소식을 전해 듣는다. 부끄럽지만 직원들의 축하를 벅찰 정도로 한 몸에 받아본다. 아침부터 퇴근까지 축하가 끊이질 않는다.
그 언젠가, 중학교 졸업여행으로 속초를 갔더랬다. 새하얀 눈이 쌓인 설악산을 앞에 두고 웅장한 산기운을 느끼며, 말 그대로의 가슴 벅참을 알게 되었다.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생각했고 고등학교에 진학과 동시에 원하던 미술반에 들어갔다. 그림을 그리며 팝송을 듣던 여고생은 우연히 본 뮤직비디오의 특수효과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선 당시에 컴퓨터그래픽은 일본이다, 하는 공식이 있었기에 서슴없이 목표는 일본. 그리고 특수효과 공부였다. 이십 대 중반이 되기 전 어느 정도의 시간은 걸렸으나 결국은 원하던 대로, 일본 도쿄 한복판에 위치한 직장을 다녀보았다.
나이 들어가며 외지에서 혼자 사는 딸이 걱정된 엄마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한국으로 돌아온 지 8년이 지나간다. 그 사이에 한번 더 계획하고 원했던 대로 미국에서 일 년을 살아보았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다. 싱글로서, 원하던 것들 바라던 것들을 위해 눈물겹게 노력도 했고 기쁨의 눈물도 흘려가며 맘껏, 실컷, 다 해 본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서른 하고도 중반이 넘어가니 이후의 인생을, 나의 평생을 함께하고픈 남자를 찾고파 졌다.
혼자인 것이 외롭고 버거워졌던 시기. 원하면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물과는 다르게 내 진짜 사랑, 내 사람 찾기는 정말이지 어려웠다. 좌절마저 했던 순간이 있었다.
세상 인구 중 절반이 남자인데, 왜 내 짝은 단 한 명도 없나 싶었다. 다 포기하고 사십 대 오십 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나 혼자서도 잘 살아가야 할 궁극적인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심각히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이건 아니지. 싶어 져 마음을 다잡고 잡다한 생각들이 맴돌 때면 배움에 집중했다. 무엇이든 배워보자 싶었기에 좋아하던 외국어를 시작으로, 평소 관심 가던 운동을 한다거나 모르는 사람들과도 적극적으로 어울리려 애썼다.
나의 외로움은 바쁨으로 이겨갔고, 새싹이 자라나듯 내 안의 에너지가 다시금 차오르던 시기에 지금의 이 남자와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연애는 다르다 생각했건만, 원하던 대로, 바라던 대로, 이뤄냈다. 그 길고 긴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내느냐가 관건이었나 보다.
봄이 오고 있다. 성큼성큼 다가온 날짜는 우리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다가오는 것만 같다. 3월이 되었고, 내일이면 24일이다.
스물여섯도 아니고 스물아홉도 아니었다.
서른둘도 아니고 서른넷도 아니었다.
나의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는 알고 보니, 서른아홉이었지 말이다. 여자나이 서른아홉!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이제야 내 나이를 자신 있게 불러본다.
서른아홉 여자, 그럼 잠시 결혼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