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 혹리열전 편] 사기열전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사기열전 중 혹리열전이란 가혹하게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대에도 현재와 같이 법이 체계적이고, 정밀하지 않더라고 필요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고, 세밀화되고 있었으며,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법에 의존하여 사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정치가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긍정적인 효과는 권력자들이 기준 없이 그들의 뜻대로 백성들을 탄압하는 것을 막을 사회적 수단을 만든 것이며, 이는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법 만능주의에 가깝게 법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려는 정치가들도 등장하여, 일말의 여지없이 법대로 적용하고, 이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뜻대로 유리하게 법령을 적용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공자와 노자는 법이 많아질수록 도리어 도적이 늘어나므로 덕으로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고 하였고, 사마천도 법령이란 사람들을 다스리는 도구 일뿐,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시대를 불을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조급한 상황이라고 하였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는 혹독한 사람만이 그 임무를 즐겁게 감당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백성을 다스리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혹독한 법이 아니라 도덕에 있음을 주창하였습니다.
질도(생몰 미상)는 양(현재 산서성 홍동현)지역 사람이었으며, 그는 법 집행에 있어 무척이나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방 호적들이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해 문제가 되자, 태수로 임명되어 호족들 중 포학한 자들의 일가를 몰살시켜 벌벌 떨게 하였습니다. 그는 청렴하고 공정하고 기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혹한 법을 최고로 여겨 외척이나 귀족들에게 적용하는 하는 것도 피하지 않았기에 제후나 황족들도 그를 융통성 없는 가혹한 관리로 여겼습니다.
한때 임강왕 유영이 취조를 받는 데, 그가 황제에게 사죄의 글을 쓰려하였으나, 글을 쓰는 도구를 법에 위반된다고 빌려주지 않았고, 임강왕은 다른 이를 통해 몰래 도구를 빌려 황제께 사죄의 글을 쓰고 스스로 자결을 하였습니다. 이를 들은 태후는 노하여 질도의 죄를 꾸며서 면직시켰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질도의 공정함을 알기에 그를 변방의 태수로 임명하였고, 그의 지도에 흉노들도 감히 질도가 다스리는 땅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임강왕 사건으로 분노하였던 태후에 의해 결국 목이 베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장탕(?~기원전 115년)은 두현(현재 섬서성 서안시)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소송과 논리에 재능을 가졌던 그는 큰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여 황제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장탕은 황제의 문학적 관심을 이용하여, 판결 때 문학에 정통한 자들로 평결을 쓰게 하였습니다. 또한 황제가 벌을 주고자 하면, 장탕은 법을 치밀하고 엄하게 집행하는 자에게 기소된 안건을 맡겼고, 황제가 용서해주려고 하면 공정하고 가볍게 다루는 관리에게 안건을 맡겼습니다.
장탕은 국가의 재정과 정책에 대해서도 황제와 논의를 하였습니다. 황제는 그와 이야기할 때, 식사마저 잊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황제의 뜻에 맞추어 정책을 수립하고 실현했고, 법령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호족과 대지주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화되지 못했고, 곳곳에 소요가 있었습니다. 관청도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않자, 법은 더 준엄해졌고, 모두들 장탕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황제의 신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장탕은 이문이라는 사람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는데, 이문이 어사중승이 된 후 장탕에게 해가 될 만한 문서를 찾아 장탕을 곤경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장탕의 속관 중 노알거라는 사람은 장탕이 이문을 몹시 싫어하는 것을 알고, 이문의 죄를 찾아내어 고발했고, 장탕은 판결을 내려 이문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황제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사건의 출처를 장탕에게 물었으나, 장탕은 노알거가 이 일을 꾸민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습니다. 그러나 장탕은 노알거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있었고, 노알거가 병들자 집에 찾아가 문병하고 다리까지 주물러 주었습니다.
조나라왕은 제철사업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조정에 여러 번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때마다 장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조나라 왕은 장탕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노알거 또한 이전에 조나라 왕을 심문한 적이 있어, 장탕과 노알거에 대해 원한을 품고 그들의 흠을 찾아내어 동시에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발내용은 장탕이 높은 신분임에도 속관인 병든 노알거의 다리를 주물 것은 무엇인가 큰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노알거는 병으로 죽었지만 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노알거의 동생이 수감되어고,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장탕은 감옥에서 노알거의 아우를 봤지만 몰래 풀어주기 위해서 모른 척했으나, 그는 이에 대해 장탕을 원망하며, 장탕이 노알거와 이문의 죽음을 공모하였다고 알렸습니다.
이 일은 감선이라는 사람에게 맡겨졌고, 그는 장탕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 안건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여 내용을 밝혔으나, 이를 황제에게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효문제 능원에 묻어놓은 무덤 안의 돈이 도굴되었고, 이로 인해 승상과 장탕은 황제에게 사죄하기로 약속하고 황제를 만났으나, 장탕은 황제 앞에서 승상이 순시를 했으므로 이는 승상만의 잘못이라고 하자, 황제는 안건 처리를 장탕에 맡겼고, 승상은 걱정에 빠졌습니다. 승상과 같이 일하는 세명의 관리는 모두 장탕에 대한 원한이 있었고, 이번 사건으로 장탕의 부정을 찾아내자고 승상과 논의하였습니다. 이후 장탕의 측근들을 심문하여 장탕이 황제와 정책을 정하기 전에 관련 물건을 미리 확보하여 큰 이익을 얻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황제도 알게 되고, 황제가 장탕에게 물었으나 모르는 척하였습니다. 이때 감선도 황제에게 노알거의 일까지 상주하자 황제는 장탕이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 분노하고 조우에게 장탕을 문책하도록 하였습니다. 장탕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조우가 장탕에게 이르기를 장탕으로 인해 일족이 망하고, 그들이 장탕의 죄를 폭로하고 있으며, 모든 범죄사실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황제께서도 장탕을 옥에 가두기 어려워 스스로 밝힐 것을 요구했으니 따르라고 하자, 장탕은 승상의 세 관리가 자신을 모함하였다는 글을 남기며, 자결하였습니다.
장탕이 죽은 뒤 그의 재산은 그리 많지 않음이 밝혀졌고, 그의 현명한 아내로 인해 검소한 장례를 지내자, 황제는 장탕이 지적한 세명을 조사하여 죽이고, 승상은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질도와 장탕은 혹리열전에 나온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강직하고, 소신이 있었으며, 국가의 이익에도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법을 이용하여 정적들을 탄압하거나 강력한 권력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의 결과는 대부분 자결, 사형 등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가혹한 법령으로 사람들을 다스렸으며, 이로 인해 주위에 많은 원한을 샀고, 결국 그것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었습니다.
고도화된 사회일 수 록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법과 규정이 모든 상황을 담기 위해서 끊임없는 진화와 더불어 무척 세밀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벽한 법을 보유하게 된다면, 사회는 완전해질 수 있을까요? 사마천은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 법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다 일수는 없으며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 백성을 다스리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혹독한 법이 아니라 도덕에 있다는 그의 주창이 현대인의 귀에도 여전히 강하게 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강함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의 균형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