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 자산 편] 사기열전으로 배우는 삶의 지혜
자산(기원전 580년~기원전 522년)은 제나라의 관영, 안영과 더불어 춘추시대 3대 명재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자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나라의 사정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鄭) 나라는 중국의 중앙에 위치에 있으며,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였고, 마지막은 진(晉) 나라에서 분할되어 만들어진 한(韓) 나라에 의해 멸망을 맞게 됩니다. 정나라는 북쪽의 전통 강대국 진(晉) 나라와 남쪽의 신흥 강대국 초(楚) 나라의 사이에서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입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초기에 주나라가 전체 제후국을 통제할 수 있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주나라의 국력이 날로 약해지고, 일부 제후국들이 패권 국가가 됨에 따라 소국 정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산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강경하고 억압적인 정치는 쉽지만 백성의 반발이 있고, 너무 너그러운 정치 또한 백성이 따르지 않으므로 그 둘을 균형 있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국내 정치와 외교, 인재등용 등에 있어 고르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산은 북쪽으로는 진나라, 남쪽으로는 초나라라는 두 강대국에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며 무력보다는 외교로서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였습니다.
당시는 진나라가 패권국가로 각 국가들을 모아 회맹을 하곤 했습니다. 이때 각 국가별로 회비를 내야 했었는데, 자산은 소국으로서 부담이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 회비를 적게 내겠다고 했습니다. 진나라는 동의를 하지 않았으나 협상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대국의 체면을 생각한 진나라가 결국은 양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화로는 진나라의 대부가 사신으로 와서 정나라의 보물을 요구한 적이 있었으나, 자산은 끝까지 이를 주지 않았습니다. 정나라 신하들은 진나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나 자산은 대국이 달라고 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 결국엔 나라에 남을 것이 없다 하며, 그 사신을 불러 자신 있게 정나라의 입장을 얘기하자 진나라의 대부는 사과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산은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하였고, 능력이 없는 인재는 등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최초의 성문법으로 정(鼎, 중국의 큰 솥)에 법령을 주조하여 공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귀족들은 성문법을 반대하였으나, 자산은 이를 통해 귀족들이 마음대로 백성을 심판하지 못하도록 하고, 귀족을 견제하며, 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서지가 재상이었던 시기에 나라는 어지러웠습니다. 이후, 자산이 재상이 되자, 일 년 만에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고, 어린아이들은 밭을 갈지 않게 되고, 이년이 지나자 시장에서 값을 깍지 않고, 삼 년이 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게 되고, 떨어지는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사 년 지나서는 밭갈이에 썼던 농기기구를 그대로 놓고 다니게 되었으며, 오 년이 지나자 군령을 기록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자산은 정나라를 이십육 년간 다스리고 죽으니 모든 백성이 소리 내어 울었으며, 노인들은 “자산이 우리를 버리고 죽었으니 백성은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인가”하며 한탄을 하였습니다.
자산이 다스리는 동안 나라는 질서가 수립이 되고 외교적으로 안정되었고, 경제가 부유하게 되고, 이에 따라 치안도 자연스럽게 안정화되고, 백성이 살기 좋은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자산이 죽자 정나라의 백성이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현재 자산과 같은 훌륭한 정치가를 기대하지만, 사기를 통한 삶에 대한 공부는 남의 대한 이야기가 아닌 자신에 대한 것이므로, 자신이 속한 사회 또는 조직에서 자신이 떠나게 될 때,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이별을 아쉬워하고 슬퍼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