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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층소화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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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Jan 05. 2024

층소화

층간 소음 화병

집 앞에 택배가 놓여있습니다.



흐물흐물 회색 비닐에 싸여 있는 무엇이었어요. 이런 비닐이면 보통 옷인데.. '내가 뭘 시켰더라?' 머릿속을 헤매며 사진을 봅니다.


이름 왕링링

진주시 금산면 이집트 1101호


'윙? 윗집? 이곳에 10년 넘게 살며 택배 사고는 내 비타민 약 한 번 잃어버린 게 다인데. 남의 집 택배가 우리 집 앞에 다 오네. 우리 동네 모든 사람의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 오래된 택배 노동자분께서는 실수가 없는 편인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할 일 없는, 할 필요도 없던 고민이지만요.


처음 택배 물건을 발견한 것은 큰 딸입니다. 제가 집을 나간 사이 갖고 들어오려다 우연히 이름을 본 거죠.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 주었어요. 설명도 없이 사진만요. 잠깐 고민했습니다. '윗 집 앞에 그냥 갖다 놔줘라' 할까? 안돼.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서둘러 답장을 합니다.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건드리지 마라" 그 자리에 두게 했습니다.



재작년이었어요. 2019년 12월 이사를 오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 윗집에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러다 관리실에서 구한 <엘리베이터 내 공지>하는 종이를 그 집에 붙였지요.


 <우리 집의 바닥은 아랫집의 천장입니다. 슬리퍼를 생활화합시다>


몇 자 없는 A4 종이를 붙여놓았습니다. 남편이 출근하는 길에요. 그 당시는 벌벌 떨면서 집 밖에도 못 나가고 힘들어하던 때예요. 남편이 퇴근하면서 종이를, 아니 공 같은 걸 갖고 들어와요. 아침에 붙여놓은 종이에 누렇고 더러운 걸 묻히고 구겨서는 우리 집 앞에 수건 돌리기처럼 던져 놓았더군요. 저는 너무 놀라 간이 철렁하더라고요. 갖고 들어오지 말고 쓰레기통에 얼른 버리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걸 묻혔을 수도 위험한 걸 발랐을지도 모르겠다 싶었거든요. 모르겠어요. 영화를 너무 봐서 그런 건지 저는 그 상황에서 극단적인 생각만 들었습니다.


우리가 돈을 내놓으라 협박을 한 것도 아닌데. 밤낮도, 평일 주말도 없이. 아이만도 아니고 어른까지 모든 사람들이 지진을 일으킬 듯 걷고 뛰고 문이 부서져라 닫으면서 슬리퍼 신으라는 의견도 보복하듯 거부하다니요. 말로도 글로도 관리실의 중재로도 안 되는 것도 모자라 이러다 '왜 우리 집에서 우리 사는데 일상을 방해하냐'며 찾아올 것 같다는 두려움까지 들었습니다. 그냥 소음과 진동뿐 아니라 윗집이 쳐들어 올지 모르겠다는 무서움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층간 갈등은 풀 길 없는 실타래 같아졌습니다.


남편이 대화로 풀어보자며 얘기를 꺼내려해도 욕부터 하는 사람들이라 좋게 해결도 불가했어요. 애 엄마는 이 정도도 이해를 못 해주냐 악을 쓰고요. 아저씨는 '애가 제 말을 안 듣네요' 하는 총체적 난국 상황.


그러니 이해를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좋게 해결해 봅시다' 할 수도 없었어요. 알아먹을 때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에요. 이사를 갈 것도 아니니까요. 결국 그것 때문에 해결이 된 것은 아닐지라도 층간소음 <이웃사이 센터> 중재위원회에까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시간이 해결을 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모든 방법을 강구하고 노력한 남편 덕이 제일 크고요.

이제 숨을 쉬면서 삽니다. 조용히 시키긴 하나 봐요. 아이가 어른 말 안 들으려고 일부러 한 자리에 서서 쿵쿵 소리 내는 행동, 그건 하루에 수십 번씩 합니다만. 기상시간만 되면 소파나 침대에서 점프로 알람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조용히 시키려고 하는 건 보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입니다. 예민하고 소심한 제게는 아직도 천둥소리로 들리는 게 고민이긴 합니다만. 둘째가 깨면서 윗집 쿵쿵 소리에 "헉? 아휴.." 합니다만 많이 달라졌어요. 애 키우는 집에서 '저 정도'는 할 만큼은요.


그렇게 일상이 평범해지려나 한 시점에 윗 집 물건의 출현은 좋지 못한 기억을 호출합니다.  갑자기 찾아온 택배에 혼란스러워진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해 봅니다. 언뜻 몇 가지가 떠오릅니다.


그냥 놔둔다. 그럼 쿠팡에 시킨 물건이 오지 않았다고 야단법석을 떨다가 배송 기사님께 연락을 할 테지. 그러면 물건을 밑에 집 앞으로 던지는 모습을 CCTV를 통해 보게 될 거고. 찾으러 오면서 '이게 그렇게 어려워? 택배 하나 못 갖다 줘?' 하며 괘씸죄에 걸려서 싸움이 나고... 지금껏 조금씩 나아진 상황은 리셋.


그러면 띵똥 호출을 한다. 내가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면 나오지도 않고 꺼버릴 거 같은데. 그게 아닌데 하면서 또 띵동 누르면.. 끝끝내 한 판하자고 하는 건가 하면서..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질 테다.


택배에 메모를 붙여 둔다. '우리 층에 와 았었습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서 가져다 드립니다.'라고 써서 줄까? '웬 친절?' 하면서 어이없어하려나? 또 메모를 구겨서 우리집에 던..


물건을 그냥 윗 집 앞에 던져 놓는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되고 "야, 네가 뭔데 내 물건에 손을 대! 죽고 싶어?" 하며 소란이 일어나고 나는 현행범으로..


택배 아저씨께 연락을 드려 '우리 집에 물건 잘 못 왔다' 얘기를 한다. 그러면 당연히 어이없을 그분은 "좀 가져다 놔주십시오"하겠지.. 그럼 그냥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데.. 어차피 내가 가져다 놓아야만 할 운명 같다.


아.. 우리 집 앞에 물건 하나 잘못 배달되었을 뿐인데 경찰 부를 일이 생길까 봐. 겁/난/다.


'아니야. 영화 그만 찍어라. 소설 쓰는 건 좋은데 내용이 좀 허황되다.' 이성을 차립니다. 혹시나 지문이라도 찍힐까 또 엉뚱한 생각이 들지만. 엘리베이터에 타서 주면 혹시나 또 화면에 박제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라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집 앞 가까이도 못 가고 방화문 앞에 손가락 끝으로 들고 온 물건을 슬쩍 밀어놓고 서둘러 내려옵니다. 10층까지 쉬지 않고 뛰어올라온 것 같은 상태의 심장 박동수가 됩니다. 간도 콩닥콩닥 거립니다.

휴. 어쨌든 큰 고민 하나 해결입니다. 윗 집과 연결된 택배 하나였지만 수많은 번뇌를 생산해 내던 물건을 해치웠습니다. 왠지 대단한 일 한 거 같습니다.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이번 기회(?)에. 물건 주러 간 김에 사이를 좀 풀어볼까?' 하고요.

아이고 됐습니다. 그냥 살게요. 욕쟁이 할머니에, 자존감 하늘 찌르는 애 엄마에, 중재도 못하는 아저씨까지 모두와 상대할 생각만으로 진이 빠집니다.

지금 같으면 예전보다 조금 살 만하니.. 지금처럼 해달라 얘기를 할 수도 없을 테고. 수고했는데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해 달라 하는 것도 화해하는 대사로는 부적절하고. 여러모로 그냥 서로 닿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해피엔딩을 원하시는 걸 압니다. 제가 제일요. 인생이 1부 2부 나눠지지 않듯 삶도, 층소도 끝이 없겠지요? 전세가 역전되지도 않겠지요? 이어지겠죠.

열려버린 귀로 사소한 소리는 더 자주 들릴지 모르지요. 제 귀에 초능력이 생긴 것처럼 그래서 예민해졌긴 하지만. 제 마음속은 발바닥에 밟힌 작은 레고 조각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의 굳은살이 박이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흔들지 못하는 마음이 되길 바랍니다. 굳세어 지기를 희망합니다.


굳세어라 노사야..


예정에 없던 택배 사고로 다음 주에 마치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던 분들, 수고한 지인 이름을 적고 책을 내며 감회가 새롭다는 말도 내어보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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