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을 피하라. 상대가 욕을 먹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가 앙심을 품을 정도로 행동하지는 마라(주 1).
대학·중용에서 주희는 이야기한다.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준 것은 본성이며, 성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도이고, 도를 닦는 것은 가르침이다"라는 것은 하늘의 원리와 인간이 행해야 할 준칙이 모두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었으므로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본성을 얼마나 잘 지켜나가고 보존할 것인가가 관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주 2).
인간의 본성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도'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잘 가지고 가르치기도 해야 함을 보게 된다. 그러려면 나 자신마저도 잘 가르침을 받아가고, 깨달아야 한다.
"예전에 온 세상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였다.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몸을 닦았다.
자신의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였다.
자신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앎을 지극히 하였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것은 사물을 탐구하는 데 있다(주 2)."
사물이 탐구된 뒤에 앎에 이르게 되고, 앎에 이른 뒤에 의지가 성실하게 되고, 의지가 성실하게 된 뒤에 마음이 올바르게 된다. 마음이 올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여지고, 몸이 닦여진 뒤에 집안이 반듯해진다. 집안이 반듯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진다.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온 세상이 태평해진다.
라고 대학·중용 주희가 이야기한다.
앎에 이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야 알게 되며, 어떤 사람은 고심해서야 알게 된다. 그러나 안다는 점에서는 같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 걸림 없이 편안하게 행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할 때만 행하며, 어떤 사람은 힘써 열심히 행한다. 그러나 성과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같다."
나 자신의 마음가짐을 먼저 다 잡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나 자신에게부터 시작하면 점점 퍼지게 되어 작은 일을 이루면 큰 일도 이루게 된다.
나도 나 자신과의 싸움과 씨름을 해나간다.
이 상황에서는 분명 이게 아닌데 하며 생각하지만 정작 행동은 잘 행해지지 않거나, 아예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배움은 중요하고, 깨닫고 알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나 자신의 대해 알아가고, 나의 성정을 알고 타인의 성정도 알 수 있게 된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절도에 맞게 발현된 중화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삼가고 조심하는 공부를 통해서 성정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이고, 중용의 도란 인간사에서 인간이 따라야 하는 행위원칙으로서의 예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때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시중의 도야 말로 중용의 도라고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성을 깨닫고 다스리려면 예의를 갖추고, 성실해져야 함을 본다. 나부터 먼저 깨달으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은 책공부이다. 모든 종교,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는 기독교라서 기독교 이외의 불교, 유교 관련 된 책은 많이 읽지는 않았다. 그런데 삶의 이치를 다른 종교, 철학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있는데 인간의 대해 알아가며 인간을 대하는 자세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게 되는 것 같아 입체적인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하는데 독서를 통한 배움과, 사람들 사이의 배움이고,
그렇게 성실함을 통해 명철해지는 본성을 깨우고,
명철함을 통해 성실해지는 그 가르침으로 성실과 명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성실함을 통해 명철해지는 것을 본성이라고 한다. 명철함을 통해 성실해지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 성실하면 명철해지고, 명철하면 성실해진다(주 2)."
다른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함을 보며 나의 희노애락이 정도가 있게 표현되어야 함을 본다. 누군가가 욕을 먹어야 마땅하더라 할지라도 그에게 앙심을 품지 않도록 하는 것.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다투거나 대립이 있을 때는 충분하게 이야기하면서 감정도 상할 수는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이 앙심을 품게 되는 것이라면 그만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요즘에 뜨는 연애 관련 예능 프로그램인을 종종 찾아 보는데 보면서 커플들의 헤어짐을 듣게 되고, 연애에서도 같은 딜레마인 것을 보게 되는 것도 같다. 그들은 한 때 연인이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다른 이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생활하는 것이 앙심을 품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명분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서로가 잘 풀고, 마무리가 좋게 되어야 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서로 사소한 것에서부터 감정이 상하고, 누군가는 화가 나서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렇게 서로 보지 않을 것처럼 하고 헤어진 후에 다시 프로그램에 나와 만나게 되는데 이들의 그 공백의 시간은 잘 해결이 된 것인지 보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이 제대로 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서 감정과 맺고 끊음을 해나가는 것의 지혜를 또다시 상기하게 되는 것 같다.
연애뿐 아닌 모든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해나가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성실과 명철함을 행해야 함을 보게 된다.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는 배워서 앎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에 있기에 나도 먼저 배우고 행하고 성실과 명철을 가지고 작은 것부터 해나갈 것이다.
톨스토이의 내적 자아를 개선하는 것은 스스로의 영적 발전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영적인 삶은 자기 자신이 깨닫고 싸워가야 함을 보게 된다. 내가 가진 것들 보다 더 큰 영적인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가진 것이 없을 때라고 할지라도 나는 영적인 삶의 열매를 맺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 되돌아본다. 부자가 가진 것보다 더 가지기를 원하는 자가 가난한 자라고 하였고, 희생이 아닌 그저 남는 것을 주는 상황이라면 받는 이의 분노를 살 뿐이라고 톨스토이는 이야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