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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r 17. 2024

2분상식| 후세인-맥마흔 선언? 누가 그래요.


이 글이 나무위키 <맥마흔 선언> 페이지에 인용되었길래 방문해서 읽어보았습니다. 관련 내용을 여러모로 분석하려고 노력하신 게 보여서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학부생 레포트 수준에 그치는 점이 아쉽네요. 한글 번역 교양서와 인터넷 글로만 공부하고, 고작 20여 페이지밖에 안 되는 원문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게 다 티가 납니다. 틀린 게 많아요... 원문을 반드시 읽어보시고, 제가 쓴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제4장 1절과 4장 결말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공부해보세요. 좋은 페이지를 만들어가는 여러분의 노력을 응원합니다. (잘 모르겠으면 질문을 남겨주세요)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얼마 후 영국은 아랍 지도자 후세인에게 영국 편에 서서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 1915년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영국 측 대표인 맥마흔과 후세인은 총 10통의 서신을 주고받고, 거의 모든 아랍 지역의 독립을 조건으로 후세인이 오토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아라비아반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프랑스와 나눠 가집니다.


이 협상은 국제적으로 Hussein-McMahon Correspondence라고 불립니다. Correspondence라는 단어는 생소하시지요? 이는 서신을 주고받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우리말로 딱 맞게 들어맞는 번역이 없기 때문인지 책이나 언론 등에서는 주로 선언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태를 볼 때마다 참 안타깝습니다. 기초가 얼마나 빈약한지를 드러내니까요. '선언'은 특정 국가 또는 단체가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자기 약속입니다. 쌍방이나 다자간의 합의를 뜻하는 협상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게다가 선언은 혼자만의 약속이니까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영국이 후세인-맥마흔 '선언'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과, '협상'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은 비판의 무게를 현저히 다르게 합니다. 따라서 영어로는 절대로 선언(declaration)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누군가 3.1 독립선언문을 3.1 협상문으로 부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어이가 없나요. 단어 하나로 역사가 왜곡되어 버립니다.


선언 이외에도 드물게 '서신', '서한', '서신교환,' '서신왕래' 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서신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지 않는 발번역입니다. 게다가 서신이나 서한은 1건의 문서로 오해될 수 있고, '서신교환'이나 '서신왕래'는 생소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번역의 문제가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무도 서신의 내용을 들여다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서신을 읽어보면 맥마흔과 후세인은 독립의 조건과 영토의 범위를 조율하며 '협상'을 했고, 양자 모두 '우리의 협정'(our agreement)'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따라서 '후세인-맥마흔 협정/협상'으로 번역하면 충분합니다. 다만, 하나의 협정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협정보다는 협상이 적절하고, 양측 대표가 만나서 협상한 게 아니라 서신을 주고받으며 협상(즉, correspondence)을 했기 때문에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이라고 부르는 게 좋습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은 벌써 100년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회자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특히,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했었는지를 두고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만약 팔레스타인이 이때 독립을 했더라면 이스라엘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독립을 약속했는지 여부는 분쟁에 대한 영국의 책임을 크게 물을 수 있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영국은 언제나 이 같은 논쟁에서 소극적이었습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후세인과 아랍인들은 즉각적으로 영국 서신의 아랍어본을 공개하면서 독립이 약속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영국은 1939년에 2차 대전을 앞두고서야 아랍인들을 달래기 위해 영문본을 공개하고, 형식적인 토론만 하고 덮어버립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1967년에 이스라엘이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영국의 문서가 대거 공개되면서 1970년대에 학계에서 활발하게 토론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는 데는 실패하고 관심이 저조해집니다.


분쟁에 대한 영국의 책임을 따지는 일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20년 간의 식민 지배를 견디지 못한 서안과 가자지구의 주민들이 민중 봉기(=인티파다)를 일으키자 이때부터 모든 관심이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분쟁의 원인을 따지는 일은 학자들의 영역으로만 좁아지고, 세간에서는 기독교, 서방진영, 제국주의/식민주의 진영 vs 무슬림, 인권운동, 피식민지배 국가들 간의 정치적 대결 구도가 확립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식민 지배를 경험한 국가로서는 사실상 유일하게 이스라엘 편을 드는 친식민주의 국가입니다.


이렇게 세간의 관심이 사라지자 영국은 슬며시 비밀문서 하나를 추가로 공개합니다.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에 외교부가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을 분석한 보고서인데, 거기에는 이렇게 단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과 관련해서, 영국 정부는 1915년 10월 24일에 맥마흔이 샤리프 (후세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지역을 아랍 독립 경계 안에 포함시키기로 약속했다.”

출처 : Foreign Office of Great Britain, CAB 24/6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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