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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트의 하루 Sep 18. 2023

프롤로그, 롯데호텔 조식 뷔페

케이트로 살기로 했다



하노이 롯데호텔 조식 뷔페.


2명의 새내기 주재원 와이프와 같이 아침을 먹게 되었다.

원래는 지인과 약속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하노이의 특이한 점 한 가지는, 비만 오면 자동차 바퀴가 잠길 정도로 도로가 물바다가 된다.


그렙이나 택시도 잡히지 않아서 한 마디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로비에서 지인을 기다렸는데, 차를 못 잡은 지인이 못 오게 되어 약속이 무산되었다.


내 옆에는 아이 학교 참관 수업을 가려다 역시나 차가 없어서 못 가게 된 엄마 한 명, 유치원 스쿨버스가 30분이나 늦게 와서 이제 막 겨우 차 태워 보낸 어려 보이는 엄마 한 명.


여긴 오픈 한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레지던스라서 아직 입주자가 몇 가족 없다. 엘리베이터, 로비, 식당, 키즈존 등등 오다가다 인사하며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이렇게 다들 일정이 취소되었으니 같이 조식 먹을까요?"


이렇게 세 명이 모여 앉았다.


"요가 선생님 맞으시죠? 언니는 어떻게 영어도 잘하고, 요가도 가르쳐요? 영어가 제일 문제예요.”


“남편 없을 땐, 6개월 국제학교 다닌 7살 딸이 울 집에서 그나마 영어 젤 잘해요. 6개월 동안 과외받고 있는데 막막해요."


"1년에 전에 왔는데 한국어만 쓰다 보니 필요성을 못 느꼈다가, 외국인 친구들과 재밌게 지내는 언니를 보면서 의욕이 생겼어요. 언니가 3년 전에 말도 못 했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하노이에 처음 와서 영어로 물 시키는 것도 어버버 했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나를 영어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던 어느 언니의 모습도.


3년 전, 아이들 국제학교에서 학부모 대상 베트남어 수업을 한다고 해서 신청했다. 몇 명 엄마들에게 얘기했지만 관심 있어하는 분은 없어서 혼자서 참석했다.  생전 처음 보는 국적의 외국 엄마들 사이에 영어도 못하고 베트남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내가 있었다.


게다가 베트남어를 영어로 배워야 하는 상황.

싱가포르, 중국, 유럽, 남미 등등 모든 학부모들이 영어를 잘해서 나는 주눅 들어 있었다. 그때 만난 언니의 이름은 '진'이었다. 한글 이름의 한 글자 정도를 따서 'Jin'.


나는 이름을 뭘로 소개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때 왜 그랬는지  원래 내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면 싶었다. 색다른 환경, 이국적인 분위기, 새로운 이름으로!


기억도 안 나는, 예전에 한국에서 영어회화 학원 다닐 때 썼던 '케이트'가 갑자기 떠올랐다. 케이트라고 해볼까.


"Hello, My name is Kate.  I'm from Korea."


부케가 유행이라던데, 하노이에서 나의 부케를 케이트로 만들어서 살아보자. 그때부터 난 외국인들을 만날 땐 케이트로 살았다.


수업이 끝난 후 진 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영어에 관심 있냐면서, 본인이 하는 영어 스터디기 있는데 마침 한 명 충원 중이라고 알려줬다.


스터디 이름은 'TED'.

매주 목요일 10시, 장소는 학교 페어런트 룸.

이름부터 학구적이다.  정해진 TED 영상을 공부해 와서 주제에 맞는 질문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물론 영어로 대화하고, 인원은 나까지 6명.


그냥 간단한 회화도 아니고 어려운 내용인데, 생전 처음 보는 무서워 보이는 언니들 무리에서 잔뜩 주눅 들었다. 나보다 언니들만 모여 있는 곳에 처음 갔을 때를 떠올려 보면 딱 그 느낌이다.


첫 시간은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예습하고, 떨면서 영어로 인사하고 생각얘기하고 정신없이 지나갔다. 스터디 후에는 함께 점심을 먹었고, 언니들은 막내인 나에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되는 정보와 얘기들을  공유해 주었다. 그 이후로 1년 넘게 모임에 나가면서 TED의 유익한 내용과 함께 영어 실력도 점점 늘어갔다.  


진 언니는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 만날 때도 나를 데려가서 소개해주고 챙겨줬다. 원래 한국어도 말이 많지 않은 나는, 거의 듣기만 하거나 묻는 말에는 거의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머릿속은 누가 말 시키면 무슨 말을 할지 계속 긴장 상태였다.


'집에 가고 싶다. 안 왔어야 했나.'


이런 과정을 거쳐 약간의 자신감이 생긴 나는, HIWC라는 하노이 국제 여성 클럽에도 가입해서 재미있게 활동했다.


진 언니는 멋있었다. 확실히 달랐다. 영어 스터디를 체계적으로 운영했고, 독서를 좋아하고 글도 쓰는 것 같았다.

캐나다에 있는 첫째 아들과 매일 일정한 시간에 통화하면서 생물, 화학 등 학과 공부를 챙기고, 함께 있는 둘째 아들과는 IB 관련 책 쓰기를 준비한다고 했다.


외국인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친하게 지냈고,  이미 본국으로 돌아간 친구들과는 줌 미팅으로 모여서 인연을 지속했다.


언니가 곧 귀임하게 되어 같이 지낸 시간은 8개월 정도였지만, 나도 언니처럼 여기에서의 시간을 꾸려나가고 싶어졌다. 언니는 귀국해서도 운동 인증, 영어 인증 등등을 이어가며 최근에는 전자책도 출판했다. 멀리서 더 멋진 롤모델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 앞의 두 명의 새내기 엄마들.

앞으로 얼마나 더 있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어떻게 재밌게 3년을 보냈는지 얘기해 줄까.


진언니가 나를 보며 느꼈을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그렇게 챙겨줬을까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들에게서 몇 년 전의 내가 보인다. 하고는 싶은데 시작을 어찌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귀엽다. 어린아이들을 케어하면서도 자신만의 의미 있는 일상을 만들어 가고 싶어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 뭐든 알려주고 싶다. 진언니가 되어주고 싶다. 케이트 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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