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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빔과 운동화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28. 2025








                     설빔과 운동화





명절이 다가오면 온 가족이 분주했다. 설빔을 준비하는 일은 명절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설렘이었다.
 그 설렘 속에는 소박함과 절약이 깊이 배어 있었다. 나는 7살 터울 형님의 옷을 물려받아 줄여 입는 일이 익숙했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옷은 동생에게 넘어갔다. 두 살 터울인 동생은 옷이 조금 커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길로 정성스럽게 꿰매지고 빨아진 옷을 입으며, 우리는 누구보다 새해를 향한 기대를 키웠다.

60년대, 운동화를 신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는 꿈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시 우리는 대부분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비록 투박하고 불편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발을 감싸는 유일한 신발이었다. 고무신이 찢어지면 헝겊으로 덧대고 바늘 실로 정성껏 꿰매 신었다. 밑창이 닳아 구멍이 나면 자전거 튜브를 잘라 본드로 붙여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고무신 하나를 오래오래 신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명절 아침, 새로 손질한 고무신을 신고 마을 길을 뛰어다닐 때면 그마저도 마치 새 신발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에는 운동화를 향한 작은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운동화를 신은 친구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운동화는 나에게 작은 꿈이자 목표였다.

어느 날, 서울 공장에서 일하던 큰누나가 설날을 앞두고 집에 왔다. 누나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바로 운동화 한 켤레였다. 형제들 중 가장 먼저 운동화를 소유하게 된 나는 그날 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운동화를 아끼느라 신지도 못하고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운동화의 하얀색이 빛나 보였고, 나는 그 작은 신발이 주는 행복을 가슴 가득 느꼈다.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을 때, 아이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걷던 순간도 잊지 못한다. 그날 나는 운동화가 단순히 신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누나의 사랑과 희생의 상징이었다. 서울이라는 먼 곳에서 힘들게 일하며 받은 첫 월급으로 우리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사 왔다는 사실이 그 운동화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다. 형제들과 옷을 나누고, 고무신을 꿰매 신으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배웠다. 운동화를 아끼기 위해 머리맡에 두고 잤던 그 밤은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처음으로 깨닫게 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운동화를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살지만, 그 시절의 작은 행복들은 잊혀 가고 있다. 형제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옷을 나누던 시간, 고무신 한 켤레를 위해 노력했던 순간, 운동화 한 켤레에 담긴 사랑과 배려. 그 모든 기억이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자, 오늘날의 나를 형성한 밑거름이다.

명절마다 설빔을 준비하며 우리는 단순히 새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과 희생을 몸에 입었다. 그것이야말로 설날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새해가 다가오면 그 시절 검정 고무신과 운동화가 떠오르며,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다시금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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